
4) THE EMPEROR 황제
테넌트
초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이상하리만치 단합력 좋은 사교계 거물들을 보다보면 사회적 죽음과 축복은 그들의 손안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합니다. 사업가들은 또 어떻고요, 그들은 파리 전역이 자신의 소유인것마냥 허황된 꿈과 나태함을 자랑하죠. 연회에 초대된 사람들을 파고들때마다 이건 마치 창조주가 짜다만 버려진 이야기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결말조차 흐려져 무엇이 목적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린채 자기과시에 목을 매는 반쪽짜리 인물들… 그들이 저의 예술에 감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때면, 그들의 위에서 한때 눈부셨던 보석들을 내려다볼때면,
어쩌면 가장 높은 자리의 오만이 이 사회에서의 진정한 순수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저를 삼키곤 합니다. 빛을 잃은 별들의 위에 서면 수많은 풍경을 볼 수 있지만, 그 풍경은 너무나도 편협해 곧 자신의 빛까지 빼앗아버리죠. 이건…예술가로서 절대 잊어선 안되는 것이기도하고요. 그렇지 않나요? 저의 아버지.
…이 곳의 블랙 러시안은 종종 필요없는 말을 상기시킨다. 겉으로 꾸며진 여유 속 남을 평가하는 수많은 눈동자가 이 칵테일의 맛을 더럽힌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시당초 사기를 합리화하는 말은 잘해봤자 타인밖에 속일 수 없다. 아무리 되뇌이고 아무리 포장해도 본질의 가치 그 이상의 미사여구를 진심으로 수긍한 적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오래 전에 수긍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가벼운 말에 그만한 의미를 부여해도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에 답을 내놓는다면,.. 그 빛바랜 답조차, 오래 전에 수긍했을지 모르겠다.
밤이 만들어놓은 고요와 이를 부숴버린 사람들, 차디찬 바람과 반짝이는 가짜 다이아.
지금 놓여있는 것들에 집중하다보면, 과거의 의문은 비에 젖듯 흐려져버린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비에 의지하면서, 의문을 버리면서, 오로지 타인을 얻어 빛을 연명하는데만 진심을 쏟았다.
괜찮을 것이다. 그 누가 이러한 삶에 감히 불만을 내뱉을 수 있을까.
“저기, 괜찮으세요?”
고개를 돌리니 어린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레스에, 장신구에… 미루어보아 아마 부잣집 가문의 딸로 보인다. 그녀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이전과는 사뭇 다른 공기가 주위사람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자신은 저 밖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콧대 높은 자신감. 허영심으로 가득 차 몰락따윈 모르며 살아온듯한 무지.
…이제야 떠올랐다.
이곳은 황실계의 사람이 주최한 파티장이다. 그 덕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왕실 사람이거나 귀족 자제들이다. 전에 만난 상류층 아가씨의 손을 빌려 초대장을 얻은 나를 제외한다면.
이렇게나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니, 지금 몸상태에 무언가 이상이 있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떠한가, 아무리 이물질이 묻고 흠집이 나도 보석은 보석인것을.
“그럼요, 이곳의 아름다움을 즐기느라 잠시 사색에 잠긴 것 뿐이랍니다. 고마워요, 레이디.”
“그,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어린 소녀의 화답에선 때묻지 않은 그녀만의 순수함이 드러났다. 나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파티에 많이 와보지 못했던건 확실했다. 오늘 밤은 이 아가씨로 적시는 편이 좋을것이다.
“…저, 있잖아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가씨?”
“다름이 아니라…오늘 파티에서 이벤트로 경매를 연다고 들었어요. 엄청 크고 화려하게요. 혹시 신사,”
“테넌트라고 합니다.”
“테넌트씨 는 그…경매를 위해 오신건가요?”
…그랬던가?
“그런거라면, 저, 저랑 같이 가지 않으실래요..? 그게, 제가 사실 이런 연회는 처음이기도 하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소녀의 말 끝이 흐려졌다. 용기내어 꺼낸 요청이 맥없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난 이런 상대를 자주 만나왔던것 같다. 한나양과 코웰양도 이랬지, 그 전전 사람도 비슷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자기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빛을 의심하는 사람을 볼때마다 안타까운 마음과 동시에 그 사람의 빛을 이용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본인대신 생판 남인 내가 알아주는 건 유감인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바로 그러한 부분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고양감을 느낀다.
“물론이죠, 아름다운 아가씨. 아가씨의 처음을 함께 보낼 수 있다니 영광이군요.”
“…!정말요?”
소녀의 불안은 마모되지 않은 순수와 함께 애착과 안심으로 적셔졌다. 평가와 질투로 가득찬 이곳에 처음으로 내던져진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나보다 믿음직한 사람은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그렇게 이 연회동안, 소녀의 빛은 나의 손에 들려있게 되는 것이다.
…
하나,
둘.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곧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더니 수많은 사람의 들뜨는 환호가 이어졌다.
“…?”
“아, 지금이에요! 테넌트씨, 곧 중앙에서 경매가 시작될거에요!
그런데…정말 괜찮으신가요? 몸 상태가 많이 안좋으신것 같아서…”
.
.
.
테넌트씨?
집중이 잘 안되네. 어지럽고, 머리도 아프고. 상관없다. 이런 날이 한두번이었나. 그냥 버티기만 하면 되는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하지만…
…만일, 만일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빛이 남의 발 밑에, 또는 나의 발밑에 군림되어지지 않는, 그 자체로 최고의 사랑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라면.
지금 나의 행동은 무엇을 위한것이고,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당신이라면 이 걷잡을 수 없는 허무에 어떻게 대항했을까요. 아니…겪기야 했을까요.
만일 당신이 옆에서 답을 알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테넌트.
.
.
.
무언가, 시원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얼굴을 감싼다.
“…죄송해요. 이렇게나 열이 심하실줄은…제가 너무 힘들게 했나요?”
순간 긴장의 끈이 풀리는 느낌이 든다. 아니다. 지금은 너무 일러. 조금만 버티자, 그 이후엔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는거야.
“괜찮습니다. 아가씨. 컨디션 관리를 못한 것은 제 탓이니까요. 다만…이 곳의 경매장은 꼭 보고 싶군요. 아가씨와 함께니까요. 부디, 양해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테넌트씨가 그렇다면…”
소녀는 머뭇거리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무래도 이 소녀는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동안 자기 나름대로 친밀감을 쌓아 올린 모양이다. 다행인건가.
수많은 빛과 샴페인, 환호와 찬사를 지나간 후에 중앙에 다다르자 보인것은 수 많은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필요 이상으로 웅장한 경매장 무대와 못해도 수천만 유로는 치장하는데 펴바른 듯한 사회자였다.
그는 마천루처럼 아래를 훑더니 잠시 후 샴페인을 들고 외쳤다.
“신사 숙녀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연회는 잘 즐기고 계신가요?
이 행사가 연회의 끝을 알리는건 정말이지 안타깝군요. 하지만, 여러분을 실망시키는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겁니다.”
“이 경매품들은 여러분이 만나는 지상 최고로 아름다운 물건이 될테니까요.”
…겉치레가 심하군. 보통 겁 없는 상인들도 저정도만큼 부풀리진 않을텐데.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저 허무맹랑한 말이 꽤 잘 통하는것인지, 듣던 사람들은 사회자의 호응에 맞추어 기꺼이 박수와 함성을 내주었다.
그 덕에 겨우 차린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골이 울렸다.
이곳까지 왔는데 본전은 챙겨야지. 경매품들이 적진 않을테고, 이 꼬마 아가씨의 재력을 빌린다면 한두개쯤은…
“이쯤에서 말장난은 그만하죠, 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상최고로 아름다운 물건을 얻을 기회가 생기셨습니다. 자신에게 진정한 빛을 선물해 이 연회 밖 사람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원하겠습니다.”
사회자는 과장된 몸짓과 함께 유리관을 감싸던 빨간 천을 걷어올렸다.
그리고, 그 유리관 안에 빛나고 있던 건.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실거라 믿습니다. 이곳, 프랑스의 옛 황제의 왕관. 저희 경매의 첫 왕관입니다. 보십시오. 이 아름다운 빛을, 꽃의 모습으로 왕관을 감싸는 다이아몬드를!“
…황제의 왕관? 제정신인가?
이곳은 황실계 사람들만 있는것이 아니며, 돈의 가치에 목숨을 거는 시장 밑바닥은 더더욱 아니다, 적어도 외양으로는.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저렇게 귀중한 물품을 내놓다니 대체 무슨…
“너무나도 예뻐요…!”
“있죠, 테넌트씨! 저 펜던트 너무 예쁘지 않나요?..아버지가 첫경매는 신중해야 한다고 했는데,..저 정도는 합리적인 거래…이지 않을까요?”
“…네?”
“저, 테넌트씨는 이런 경매에 능숙하신것 같은데, 조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순간, 주위의 소음이 일제히 머리로 쏟아졌다.
“저 정도는 합리적인편인가?“
”수식어가 좀 과분한데.“
“당신은 어때? 시도해볼만한가?“
“이 근방에서 저 정도의 가치가——-
진정한 가치를 물질에 두는 자들은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며 그 자체로 눈먼 신도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쫓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남들 위에 서려하는 것. 그것이 곧 오만이다.
이것은 여태까지 뼈저리게 알고 있던 것 아니었나,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테넌트씨..! 일단은 가격 제시가 먼저,
…테넌트씨? 어라, 어디가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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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상점가의 거리, 차가운 밤공기탓에 몸은 무거워지는 것과 반대로 정신은 점점 맑아지는 듯 하다.
그대로 도망쳤구나, 헛것까지 보면서. 프로답지 않은 짓을 저질렀지만…지금 내게는 그런 것들조차 제대로 와닿지 않는다.
의식이 끊기고, 맑아지고, 끊기고, 맑아지고.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문득 하늘에 눈이 닿았다.
구름이 저렇게나 빨랐던가.
…아무런 대책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뭘해야 하지. 일단 이 곳을 잠시 떠나야 할까. 먼저 머무를 곳부터 찾는게 나으려나.
이대로는 생각도 전에 죽을게 뻔하니, 숙소부터 구하기로 하자.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곧 여기사 멀지 않은 곳의 여관 하나를 기억해내어 억지로 몸을 이끌고 다시 움직였다.
조금 위험한데, 여관이 여기서 얼마나 멀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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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흐려지는 의식에도 줄어들 기미가 없는 잡생각에 묻히던 도중, 코너를 돌다 상점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에 눈길이 멈췄다.
가게 불빛에 반사된 것은 평소의 나였다. 검은 챙모자에, 빨간 코트에, 신사 연기를 하고,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예술가.
…분명 그렇게 보였는데, 지금은 사뭇 다르다.
김 서린 유리 너머 날 바라보던 눈은,
아까의 경매 사회자, 그를 우러러보던 관중들, 물질과 가치에 목을 매단 그 자들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