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DEATH 죽음
포겟미낫
휑
펜은 하늘의 숨통을 끊는다.
연약한 장막의 끝자락을 거칠게 잡아채어 짓누르고 시리게 푸른 목덜미를 향해 죽음을 내리꽂는다.
혀는 땅의 심장을 부순다.
쉴 새 없이 펄떡거리는 싱싱한 붉은 살덩어리를 손아귀에 욱여넣어 기어코 산산한 조각으로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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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영업 전문점. 주점 '월든'의 낮은 한가롭다. 가뜩이나 어두운 곳에 지하라는 공간의 특수성까지 더해진 영업 시간과는 다르게,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금빛 햇살이 비치고 매어지지 않은 커튼은 산들거리는 옅은 바람에 의해 잔잔하게 흩날린다. 팔락, 팔락. 바람이 그리 거센 것도 아니었으나 커튼의 끝자락은 빳빳하게 펴져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창문이 하나, 둘, 셋. 그리고 마침 창문들 아래,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볕 좋은 위치에, 매끈한 벨벳으로 볼록하게 짜여진 소파가 자리했다. 한낮의 벽시계는 이제 막 삼십 도, 오후 한 시에 맞춰져 있었다. 알맞은 시간에 알맞은 위치, 누구라도 나른한 몸을 누이고 한 시간만이라도, 아니 삼십 분이라도 잠깐 눈을 붙이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굳은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밝은 햇살 아래로 조금이라도 몸이 닿으면 삽시간에 타 버릴 것을 두려워하듯이 그는 방 왼쪽 구석의 의자에 앉아 빼곡하게 글씨가 적힌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이로써 창문을 꼼꼼하게 열어 놓은 의미가 없어졌다. 동그란 원형의 금색 안경테가 광원에 따라 희미한 빛을 반사했지만 음울한 기운을 몰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미 몸의 낮밤이 바뀐 지 오래여서인지, 아니면 뭇 사람들이 익히 말하듯 전부 천성인 것인지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중충한 기운을 발산한다. 맨들한 눈동자가 연신 검은 글씨들을 훑었다. 작성은 이미 전부 끝났다. 이제는 실천 단계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 종이 위에 올려져 섞여 있던 편지를 집어 들었다. 나머지 종이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편지 봉투는 은은한 아이보리 색으로, 짙은 색의 왁스 조각이 입구를 단단히 막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편지칼을 썼을 테지만, 어차피 조금 뒤면 애써 보여주고 싶어도 그 누구에게도 내보여줄 기회가 없는 물건이기에 그는 대충 손으로 봉투 윗부분을 잡아채 뜯어버렸다. 왁스에 고정되어 있던 뭉툭한 부분이 살짝 찢겨지며 본래의 둥근 형태를 잃어버리고 너덜너덜해졌다. 옅게 찢어진 편지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젠가는 정리하겠지. 편지의 맨 윗부분에는 월든과 편지 수신자의 이름이 정교한 글씨체로 적혀져 있었다. 은은한 군청색이 도는 고급 잉크로 적힌 이름은 종이의 재질을 완벽하게 가리며 그 자체로 존재했다. 이름은 너무나도 선명하여 마치 돌에 새겨진 조각과도 같았다. 순간이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도 영원히 남아서 살아 있는 증거로서 숨쉴 것만 같았다. 편지 맨 아래쪽에는 역시나 정갈하게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S-o-t-h-e-b-y, 파티 초대장에 대한 수락의 표시이다.
그는 편지를 원래대로 접어 종이 사이에 끼우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손을 접자 자신의 손가락 끝이 손바닥을 하나하나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단정하게 관리된 손톱에 찔려봤자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더, 더 세게 눌렀다. 둥근 것이 탄탄한 살가죽 안을 파고들 수 있다는 듯. 바깥에서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모를 새는 신나게도 울어댔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저 새의 울음소리를 단순한 경쾌함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비통함의 표현일지 누가 알겠는가?…… 비통함, 비통함. 그는 한 번도 비통함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없었다면 평범한 주점의 사장이었을지도 모르는 것, 만약 없었다면 조금 더 격렬한 춤을 즐겼을지도 모르는 것, 만약 없었다면 금전적 기대를 안고 증권가로 향했을지도 모르는 것, 만약 없었다면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평생 친구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것, 만약 없었다면 낮에는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어쩌면다른 사람들과 밤 늦게까지 웃으며 영화를 보았을지도 모르는 것. 그러나 이는 단순한 가정이다. 가정이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해보는 것.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고, 이미 일어날 기회가 영영 없어진 일들이다.
그리고 자신은 곧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가정 역시 없앨 예정이다. 비련의 복수, 영원한 비겁함, 대상 없는 분노, 끝나지 않을 원망. 지극히 무의미하다. 해 봤자 아무도 좋을 게 없다. 남을 것은 한 미치광이의 웃음 뿐, 그마저도 곧 쏟아질 빗방울에 쓸려 내려가 하수구 깊은 곳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는 전부 정해져 있는 일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고정된 사건을 조금 더 앞당기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악행이면, 문제될 것이 있는가? 결국 사람은 누구나 악행을 저지르며 산다. 아무리 청렴결백하고 꼿꼿하게 다정하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해도 걷다가 무심코 작은 벌레를 밟거나 시궁쥐가 챙겨놓은 식량을 걷어차 버렸을 것이다.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필연적으로 슬픔은 발생한다. 모든 죄에는 대가가 따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함, 과격함, 광기, 몰상식함, 무질서에 따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모든 것이 재건된 이후에, 그 이후에. 상처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것이 채 다 아물지 못한 흉터를 다시 칼로 도려내어 고통스럽게 찢어내는 일이 될지라도.
창밖에서 거리를 뛰어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 위에 놓여있던 종이들이 흩어지며 바닥으로 산개하여 제각각 떨어졌다. 창틀에 손을 얹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어릴 때도 이렇게 바깥을 내다보았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훌쩍 커 버려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쉽게 창틀에 손이 닿았고, 시선은 직선으로 바깥을 향했다. 곧 이 세상은 죽을 것이다. 죽어버릴 것이다, 고운 천에 감싸여 긴 관에 들어가서 깊게 판 땅에 누울 것이다. 그때 되면 누가 울어주려나, 누구 하나 이 세상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있으려나? 고통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멈추고, 내리는 비에 옷자락이 젖어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사람들은 일렁이며 녹아내린다. 불행할까? 아니면, 자각조차 하지 못하기에 행복할까? ……그것이, 계획을 설계한 이유 중 일부이다. 며칠 뒤면 세상 사람들 중 일부는 극심한 공포에 허덕이며 구원을 찾아 저 화려한 광란의 거리를 뛰어다니겠지. 그 꼴은 정말로, 정말로…… 꽤나 볼 만할 것이다. 공포는 상대적이다. 누군가가 공포를 느끼면 누군가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공포는 또한 순환하기도 한다. 이제 공포라는 이름의 거대한 쇠공이 올려진 판이 반대쪽으로 기울어질 때가 되었다. 천천히, 천천히…… 판이 뒤로 넘어가고 공은 점점 가속하며 구르기 시작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정이다. 공포에 삼켜진 세상을 지우고, 지운다면…… 모든 것이 재건될 것이다.
부디 불행을 위한 장송곡이 영원토록 울려 퍼지기를, 나는 감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