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THE HIGH PRIESTESS 여성대사제
이터니티
자판기
바다 마녀, 푸른 피의 악마, 같잖은 내 이명이라더군. 날 따라다니는 수많은 매도와 질책....... 소문, 그리고 영생의 비밀까지.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며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지. 그것들은 시간을 이기지 못해, 시간은 날 이기지 못하고 말이야.
묵직한 가죽가방
그득 낀 달무리에 달도 겨우 고개를 내미는 밤. 엑서터의 낡은 기차역에 노란 할로겐 등이 깜빡거린다. 벌레도 꼬이지 않을 새벽시간 인지라 다 닳은 전등의 파짓- 하는 소리가 대합실 안을 채운다. 전쟁이 끝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역사의 곳곳엔 그을음이 남아있었다. 그도 그럴게 페인트 칠이 벗겨진 대합실 의자와 언제 닦았는지 모를 뿌연 유리창은 수명 다한 전등과 함께 관리라는 단어는 잊은 지 오래인 듯했다.
그리고 그곳엔 어울리지 않는 한 귀부인이 앉아있다. 긴 은발을 화려하게 틀어 올린 머리 하며, 특유의 짙은 푸른색 원단으로 온몸을 두른 자태가 모로 보아도 부유한 사모님 혹은 부잣집 영애 어쩌면 높으신 직책하나를 틀어쥔 세력가로 보인다. 길을 잘못 든 것만 같은 그녀는 꽤나 크고 낡은, 그러나 그 표면에 묻은 세월보다도 무게감 있는 고급스러운 가죽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가 제 목적에 맞게 이곳을 찾은 손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표였다.
푸르스름한 달빛보다 더 자욱하게 내려앉은 추위를 뚫고 녹슨 기차가 새벽안개를 타고 들어온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덜커덩 소리에 점점 할로겐 등의 소리가 지워지고, 귀가 시린 브레이크 소리가 대합실 유리창을 때리자. 귀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나 서두름 없는 자태로 묵직한 가죽가방과 함께 기차에 오른다. 꾸벅 졸며 역사를 지키던 역무원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두어 번 눈을 비비고는 별일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그녀로 말하자면 마을의 명물이었다. 엑서터의 작은 마을 안에서 마도학자란, 그 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 흔히 볼 수 있었던 종류는 아닌지라, 거기다 마도학자와 인간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돈이라면 마도학자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교류해 왔던 그녀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마을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역무원은 굼뜬 몸을 움직여 인사라도 건네려 했지만, 그의 다짐보다 빠르게 기차는 브레이크를 풀고 다시 어둠 속으로 달려 들어간다.
몽매 - 비둘기는 둥지를 잘 만들지 못하며, 후회와 실증뿐이다.
누구도 이것이 거짓이라고 부정 또는 긍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변한다.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내면서 일까.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순간들이 퇴색되고 사건하나하나에 자신들의 근간을 너무 손쉽게 내어준다. 그들에게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간이 주어지는 듯도 하다. 그 시간을 오롯이 저를 위해서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모여 군락을 이루고 마을을 이룬다 그리고 나라를 세운다. 개개인의 시간이 모여 종국엔 하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지금 역사적인 시간아래에 서있다.
뉴 햄프셔의 주지사는 관할의 작은 마을은 잊은 지 오래다. 언제나 그들은 자신의 팔 안이 먼저였기에 유사시엔 다른 힘 있는 인근 지역의 일처리가 우선이었다. 그렇기에 엑시터 마을사람들 모두 그들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반신반의로 그들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의문의 살인사건, 피가 쪽 빨려 죽은듯한 시체들, 창백한 피부에 힘없이 걸어 다니는 이름 모를 거수자들. 그 모든 일들의 시작도 끝도 불명확했던지라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채로 지원을 기다리기를 수일. 그렇게 오지 않을 답장을 기다리며 오늘도 수구의 시신이 묘지에 묻혔다. 흙이 아닌 시체로 덮인 것을 묻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뱀파이어. 뱀파이어. 뱀파이어.
사람들 사이로 점차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저주 혹은 괴물의 등장. 기괴한 이야기로 시작된 풍문은 점차 점차 불어나 뼈가 생기고 살이 붙었으며 다리가 달린 듯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의 '뼈'를 이루는 것은 그녀의 존재였다.
흰 앞치마에 피를 잔뜩 묻힌 방앗간 지기는 오늘 여덟 살 배기 아이를 제 손으로 '묻고' 오늘 길이다. 그녀는 일찍이 이 문제를 뿌리 뽑지 않았음에 후회로 가슴을 쳤다.
뒤에서 날렵하게 꺾인 쇠스랑을 두어 번 손에 틀어쥔 농부는 보름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그녀와 이별하기 전 그는 술에 진탕 취한 채로 아내가 마을 성당을 들락거리는 것이 꼭 망할 놈의 신부님과 눈이 맞은 것 같다는 질 낮은 모욕을 퍼부었던 참이다. 며칠 비실비실 몸이 안 좋다더니 성당을 들락거리며 주야장천 기도만 드리는 모습을 꾀병으로 치부한 결과였다.
횃불을 손에 든 바커스 씨는 긴장감에 연신 기침을 해댔다. 악마를 잡으러 오면서도 그 악마가 팔았던 마늘 목걸이를 허리에 차고 있을 정도로 겁이 많았던 그는 죽음을 공포 앞에서 분노로 용기를 벼려냈다.
밤을 타 하나둘 모인 마을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정과 이야기를 품고 분노로 이를 갈며 어쩌면 이제 종지부를 찍을 뱀파이어사냥의 마지막 페이지에 등록될 시간 앞에 와 있었다.
긴장 속의 침묵도 잠시, 마을 대표로 내몰린 바커스씨는 형식에 맞춰 꼬깃꼬깃 써온 성명문을 꺼내 한 자 한 자 낭독하였다. 성명문의 한 행 한 행이 읊어질 때마다 숨죽여 있던 울분이 그리고 곡소리가 저마다의 잎에서 터져 나왔다. 결국 채다 읽지도 못한 형식적인 성명문을 뒤로한 채 앞다투어 꾹 닫힌 상점가의 문을 부수기 시작한다.
이름 모를 병세를 호전시킨 약물을 산 곳이었다.
꽤나 값을 치르긴 했지만 철없는 아들의 선물을 사기 위해 해마다 한 번은 꼭 들르던 곳이었다.
마을의 대소사에 나서진 않았어도 늘 뒤에서 귀한 약재건 물품이건 인간과 마도학자를 가리지 않고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던 만물상이었다.
가끔 들어오던 해산물을 통 크게 구매하던 마을의 큰손이었다.
이변이 없었다면 올해의 마을 축제에도 호랑가시나무로 엮은 크리스마스 리스를 팔았겠지. 거기에다 수도 성당의 특제 성수를 뿌리며 기른 나무로 엮었다는 설명 역시 동봉되어 웃돈을 얹어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점의 나무문이 부서짐과 함께 그들의 기억들도 하나하나 떨어져 나간다. 지금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분노뿐이다.
하나 둘 늘어가는 변사체들과 창백히 변해가는 마을사람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객혈의 파열음은 사람들을 미치게 했고 그녀가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 되었는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 억울한 분노를 해소할 만한 대상이 필요했을 뿐. 그러나 잔뜩 끓어올렸던 분노가 무색하게도 상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 떠난 지 몇 시간은 족히 되어 보였고 남은 것이라곤 바닥에 굴러다니는 갑각류의 껍데기와 말라붙은 푸른 피뿐이었다.
마음의 방향 - 잠들 수 없는 밤.
고통을 인내하는 아침.
길지만 말할 대상 없는 오후.
조용히 한 권, 또 한 권의 책을 펼친다.
기차가 몇 시간을 달렸을까. 하얗게 김이 서린 창을 닦아내지도 않고 물끄러미 보는 이터니티의 입가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점차 떠오르는 태양과 차창안까지 찾아 들어오는 햇살이지만 아직 안과밖의 온도차가 큰지라 창가의 김은 한 겹 한 겹 더해져 뿌연 것이 꼭 엑시터의 역사 대합실의 유리창을 연상케 했다. 이렇게 숨을 다 몰아쉬고 나면 마음은 편해졌으면 좋으련만, 생각의 흐름이은 계속해서 그곳으로 흘러버리는 것을 그녀도 어쩌지 못했다.
순박했던 마을사람들과 유쾌하지 않은 이별은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낌새를 눈치챘을 때부터 이별을 준비해 온지라 잊거나 손해 본 것 없이 나름 깔끔하게 자리를 떴지만,....... '그래 이렇게 셈을 하노라면 복잡한 마음이 좀 덜어지겠지.' 하며 가죽가방의 어귀를 매만졌다. 마도학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탕약사탕 몇 통과 어린아이들을 현혹할 소품, 다음 정착지의 기반이 될 크고 작은 판촉용 상품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선 가장 중요한 돈, 채권, 수표들까지 알짜배기만 긁어모아한 짐 무거운 가방이 되었다. 보기 불편할 정도로 묵직한 가죽가방을 달고 다니는 것은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지만, 지금은 그녀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좋아,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구나. 밤은 깊어가고 잠 오지 않는 밤이 이어지겠지. 정신을 차리는 거야"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은 법이다. 어떤 과거를 품고 있는 지를 떠나 이사실만 알고 있다면 다시 생활의 기반을 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조금 더 유연한 사고로, 과감하게 세상을 보고 선택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다 보면 다시 이전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그녀에겐 이미 풍부한 경험이 있다. 불안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런데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떨게 하는 것인가?
이터니티는 얼굴에 주름이 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눈을 감았다. 잠시라도 의식을 놓치면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말 정도로 머리가 아파왔다. 그녀의 의식은 계속해서 그녀를 지난 한밤중으로 데려다 놓았다. 미쳐버린 마을 사람들 앞에 던져진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가도 짐을 가방에 쑤셔 넣으면서도 이곳저곳을 부딪히고 깨트리며 심한 불안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도 거기 있었다. 그리고, 푸른 피.......
이미 지난 일들을 되감고 되감아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은 없다 하지만, 떨림은 조금씩 고개를 쳐들고 일어섰다.
뜨거운 우유는 꿈의 수호신이다. 그것은 미지의 공포를 처리하고, 과거의 그림자를 쫓아낸다.
그때 덜그럭 거리는 바퀴소리를 내며 승무원이 지나 친다. 간이 카트 위의 싸구려 음식 냄새는 카트 보다 더 빨리 객실 칸을 바삐 채우고, 몇몇의 승객들은 듬성한 객실칸보다도 더 텅 빈 배를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음식을 시킨다. 멍하니 창밖만 보던 이터니티는 돌연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따뜻한 우유 한잔, 꿀을 두 스푼 정도로 탔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손님 꿀은 현재 비치되어있지 않습니다. 따뜻한 우유에 설탕을 타 드릴까요?"
그렇다면 따뜻한 우유 한잔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대답과 간단한 인사말이 오가고 그녀의 손에는 뜨거운 우유 한잔이 쥐어졌다. 손끝에서부터 부드러운 온기가 몸을 타고 전해진다. 천천히 긴장감이 수 그러 들고 피로한 몸이 수면 위로 둥실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의 영감의 매개는 푸른 피였지만. 그녀는 이제껏 그 힘의 진가를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남들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신의 혈통에 내려오는 마도술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힘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말이다.
다시 머리가 아파옴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미간을 피며 이터니티는 귀찮아질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당장이야 크게 변화가 있는 듯하진 않지만 새로이 깨우친 이 힘이 외형적인 변화 역시 막아낸다면, 그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 들위로 시간이 겹겹이 쌓이면 쌓일수록 영생의 힘은 그 위력을 더욱 발휘한다. 그러면, 그래서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이 그녀가 가지게 된 저주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그 끝은 점점 귀찮아질 일들의 투성이었다. 머지않아 그녀는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부랑자 혹은 여행객으로 평생을 여행하고 떠돌며 기억 속에서 지워진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감히 그 아무도 추궁하지 못하는 자리까지 오를 것인가.
끊임없는 생각의 꼬리들은 이윽고 따뜻한 우유 한잔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터니티는 손끝에 맴도는 짙고 부드러운 수 겹의 안개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두 손 가득 머그컵을 잡고서 숨을 고르길 몇 번, 그리고 한 모금. 몸속으로 들어간 뜨거운 구슬은 천천히 몸을 타고 내려와 뱃속에 따뜻하게 퍼져나갔다. 이터니티는 계속해서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잔을 비워냈다. 그리곤 분명 피곤에 지쳐있을 몸을 정갈히 하고 조금은 딱딱한 좌석 등받이에 기대 누었다. 따뜻한 우유보다 더 따뜻한 평온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의식도 단잠에 몸을 실었다.
가끔은 내가 허수아비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 만물은 곤경 속에서도 봄이 찾아오고 수시로 변하는데 나는 변함없이 홀로 내 갈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떠나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 기차의 종착역은 항구도시였다. 조금은 춥고 비린 바람이 불어오는 항구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며 그녀는 소금기 가득한 바람을 맞았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점차 좋지 않을 낌새를 느낄 무렵, 그녀는 뱀파이어와 관련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자신이 그 소문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평생을 살아온 마을, 종종 물건을 떼오는 일이 아니고서는 마을 밖까지 멀리 나가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제 한 몸 지킬 수 없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마을의 분위기는 그녀가 느끼던 것보다 더 흉흉했고 날이 더해질수록 갈 곳 없는 분노는 망령처럼 사람들 사이를 떠돌며 천천히 새끼를 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저하나 살겠다고 그들을 해치는 꼴이란....... 오히려 소문에 힘을 실어줄 뿐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리 만무하다는 것은 경험 많은 장사꾼으로서 충분히 예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해변가에 다다른 그녀는 무거운 가죽가방을 쥐고도 힘든 기색 없이 걸었다. 어업으로 먹고사는 마을이라 그런지 그다지 잘 정리되어있지 않은 모래사장 위로 비싼 구두의 굽이 푹푹 빠졌다. 개의치 않으려 하다가도 자꾸만 발목을 잡는 통에 그녀는 시원하게 두발에 자유를 선사하기로 했다. 발바닥 밑으로 느껴지는 가는 모래 거친 돌멩이 몇 개의 촉감을 느끼며 맨발로, 맨발로, 한참을 걸었다. 한 손에 들린 가죽가방이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하느라 어깨는 점점 뻐근해져 왔고 거친 해변의 모랫더미는 소금기를 가득 머금어 고운 그녀의 발에 자꾸만 생채기를 내었다. 이윽고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리고 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숨을 뱉어내었다. 그녀는 덜어내야 했다. 그녀를 이루는 많은 것들을 많은 시간들을 혹은 미련이나 소중한 추억들 까지도. 그 모든 것을 덜어내야 했다.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나머지 이제 그녀는 울음을 뱉어내었다. 짐승의 아우성이자 멀리 떠나가는 뱃고동 같은 소리가 났다. 마주 손을 흔들어줄 이도 없건만 이터니티는 온몸을 떨며 이별을 고했다.
사람이란 것일랑 당최 믿을게 못되었다. 하지만 세상만사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어디 있으랴. 혼자만 살아야 하는 존재가 어디에 있으랴. 혈혈단신에 혈육도 남지 않은 몸뚱이를 끌고 살아남았다. 마을 사람들을 가족이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수년을 동거동락한 사이가 아니던가. 이터니티는 그 배신감에 서러움에 홀로 된 외로움에 울었다. 동시에 그녀는 그들을 위해 울었다. 자신과 다르게 소중하고 소중한 가족들로 이루어진 그 무리들을 그리고 그 속에서 끈끈한 사랑을 나눴을 그리고 하루아침에 자신의 일부를 썩고 냄새나는 두엄더미 위에 내던져야만 했던 그들을. 그저 원망만 하기엔 그녀는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부대꼈으니 그만큼 서러운 마음과 동시에 연민과 공감이 이는 것은 모질지 않은 그녀의 성정 때문일 것이다. 맘 놓고 원망하지도 못하는 그녀의 분은 마치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갈데없던 분노가 새끼를 쳤듯이 그녀의 몸속에 알을 까 낳아 온몸을 비틀며 부화해서는 그녀의 속을 가득 채워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이 부풀어 오르게 했다. 덜어내야 한다 덜어내야 한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자신 몸속에 가득 찬 울분을 뱉어 내었다.
겨울 바다가 아무리 시리다지만 외로운 내 심사 보다야 차디찰까. 주어진 모든 것들은 구름이 흩어지듯 파도에 쓸려가고 걸음을 재촉하는 바다는 온 주위를 춤추며 깊은 곳으로 나를 끌고 가는데, 이 바다가 죄 마를 때까지도 홀로 남겨질 운명인지라 파도는 나를 다시 떠민다. 육지로 육지로 그의 변덕에 못내 서러움을 느끼지만 그 서운함 까지도 씻겨 내려가면 고운 모래 깔린 백사장 위로 홀가분히 다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카드에 관해 -
오래 살다 보니 모르는 게 없어. 죽은 사람 이야기든, 산사람 이야기든, 제값만 쳐주면 답을 줄게, 하지만 뜨거운 감자는 만지면 안 되는 것처럼......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지.
돈, 돈, 돈. 그녀는 20 퍼 센트의 자신감과 30 퍼 센트의 아름다움, 40 퍼 센트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도합 90퍼센트의 능력은 철저히 돈을 부르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생을 살면서 그녀가 깨달은 몇몇 가지 사실 중 하나. 아니지, 굳이 영생을 살아내지 않고서도 모두들 돈이라는 것의 매력을 모르는 이는 없다. 너무 잘 아는 나머지 더러는 제 자신도 버리고 질질 끌려다니는 수전노를 자처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녀가 그들과 다른 점은 어떻게 하면 돈의 위에 설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길게 늘어트린 머릿결은 갈라짐 하나 없었고, 우아하고 조금은 오만한 듯한 말투, 곳곳을 꾸민 명품 주얼리들과 그에 지지 않는 그녀만의 기품은 알 수 없는 신뢰감을 더했으니, 배웠다 하는 사람도 반수 접게 만드는 것이 그녀가 가진 무기이기도 했다. 간혹 그 신비스러운 여인을 비밀을 캐고자 여러 곳에서 그녀를 보기 위해 들리는 이들은 종종 있었지만 멍청하게 그 비법을 물어대는 질문엔 "명석한 두뇌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눈"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더 깊이 캐묻고자 하면 예의 아우라를 뿜어내며 감히 묻지 않을 것을 침묵으로 권하고는 한다.
만약, 당신은 그녀에게 다른 해답을 얻고 자 한다면 이렇게 말해 둘 수 있겠다. 그녀의 손에는 하늘의 율법이 들려있다. 그녀는 영원한 비밀의 유일한 여주인 일 지니. 어쩌면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속마음 까지도 들여다보고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어떤 질문을 하든 그녀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소리를 꺼내 들어라, 단 입에는 머금지 않고 가슴으로 삼켜 내어라. 모든 것의 대답은 자신의 안에 있다.”
그것을 받아들여라. 양단된 갈등을 조화로이 바로잡는 것이 먼저이며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마무리이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속에 숨은 비밀까지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명심하라 입을 열었다가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가진 모든 깨달음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