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JUSTICE 정의
디케
잔향
Iustitia.
남을 해한 자는 제 피 또한 흘릴 것이고, 불의를 저지른 자를 맞이하는 것은 의로운 심판일지어니.
이는 정의가 내리는 죄에 따른 응보다.
“하여 최근에는 별 일이 없소?”
디케는 대법관이다. 일반적인 법정의 그것은 아니고, 상식에 어긋나거나 마도학자와 연루된 사건을 담당하는 특별 재판소에 소속되어 있다.
“예. 판사님 덕이지요.”
그는 오랜만에 시찰을 나온 참이었다. 한동안 시간이 비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는가? 주민들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재미있지만 그 속에 숨겨진 목적이 있다는 것을. 어떤 관료가 부정부패를 저지르는지 제일 먼저 알아낼 때 이 방법은 꽤나 효과적이다.
“진실이오?”
거짓을 말하는 것도 의를 저버리는 행위에 속하오.
언뜻 서늘해보이도록 덧붙인 문장이었다. 디케와 대화하던 남성은 그 말에 보기 좋게 넘어갔다.
“그, 그것이.”
“숨긴 것이 있나.”
“그게 아니라……!”
디케가 손을 떨쳤다. 풀어졌던 자세를 고쳤다. 친근함이 사그라들고 냉정한 대법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바른대로 고하시오. 이 검이 그대에게도 향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터. 아, 물론 무고한 자는 정의가 수호할 거요. 안심하시오.”
위압감 있는 모습은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믿음을 준다. 남자가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저를 지켜달라고 몇 번을 당부하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실은……이전에 ‘판결’하신 이후 새로 온 영주님 말이지요. 처음에는 괜찮나 싶더니 얼마 못 가고 본색을 드러내더랍니다. 세금을 과하게 높이 매기고는 모조리 자기 이익으로 삼거나, 전시 상황도 아닌데 물자가 필요하다며 있는 것 없는 것 다 뺏어가거나……. 저희 가족도 형편이 어려워진 상태입니다.”
침음이 울렸다. 디케의 것이었다. 얼마간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나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다니.
“나의 불찰이 유감스러울 뿐이오. 심히 안일하였군.”
“아닙니다. 판사님처럼 고귀하신 분들께서는 아랫것들을 돌보시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쓰실 수 없겠지요.”
“입에 발린 말은 필요치 않소. 난 그들과는 다르오. ……영주라 하였지. 그 아랫것들이 아니라.”
“예에.”
그 길로 디케는 조사를 시작했다.
사람들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굳이 구슬리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어찌나 심각했는지 조금 찔러보면 다들 입을 열었다. 새 영주는 부패한 인물이며, 백성의 곳간에 마수를 뻗는 건 예삿일이라고. 이렇게까지 민심이 일치한다면 더 지체할 이유가 없어진다. 더군다나 정식 초대를 통하기에는 영주가 벌여놓은 일이 컸다.
어깨에 얹어진 홍염이 그가 향해야 할 곳을 알리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휘날리는 판사복이 궤적을 만들었다.
디케의 올곧은 걸음이 멈춰선 곳은 영주가 머무는 성이었다.
“멈춰라! 아무나 발 디딜 수 없는 곳이다.”
“……비켜설 기회를 주겠소.”
푸른 눈이 문지기들을 관통했다. 영주 밑에서 일할 정도라면 소문을 접한 적은 있으리라. 잔혹한 징벌의 악령. 디케에게 붙은 칭호였다. 그들의 시선이 교차하더니 마침내 창을 거두었다.
“현명한 선택이오.”
성의 구조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긴 회랑을 지나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러나……그가 업무에 눈길을 두긴 할까? 의문이 스쳐갔다. 디케는 몸을 돌려 침실 쪽으로 향했다.
폭정을 일삼는 고관대작들은 대체로 정무에 관심이 없었다. 끽해봐야 세율 올리기 정도에나 의견을 얹고 말겠지.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침실의 두꺼운 문 너머에서도 영주의 기척이 느껴졌다.
“잠도 요란하게 자는 건 저들의 특징인가.”
저런 작자에게 배려 따위는 필요치 않다. 곧장 문을 열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
“누, 누구냐!”
“꼴사납군.”
디케의 새빨간 플랑베르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름거리는 불꽃에 영주는 반사적으로 그것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몽중의 환각은 이제 사라지고도 남았겠지.”
조소와 함께 검이 영주를 겨누었다. 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듯 하니 소개는 생략하겠소. 그대를 찾은 이유는……설명해야 하오?”
침실 곳곳이 비싼 장신구로 치장되었으며 영주가 휘감은 천은 누가 보아도 고급임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그런데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모습이 우스웠다.
“익명의 제보가 있었소. 그대가 주민들을 수탈하여 제 배를 불리는 데에 급급하다는.”
“모함, 모함이다. 나는 한 번도……힉.”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있는데도 거짓을 고할 거요?”
불길이 치솟아 그의 말을 끊었다.
보통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본성을 보인다. 영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탐욕이 가득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추악하게 비틀린 입이 열리고 궤변이 쏟아졌다.
“……그게 잘못되었나? 그들이 딛고 사는 땅을 누가 갖고 있는데! 내 땅에서 난 것을 내가 가지는 건……당연한 일이지.”
이후로도 그는 한참을 주절댔다.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인지.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진절머리가 났다. 디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쯤 해두시오. 그대가 이 검의 이름을 알까 모르겠군.”
“플랑베르주 아닌가? 그런 것도 모르는 일자무식 평민 따위와 나를, 컥!”
“검명을 물었소.”
디케의 검은 죄악을 모조리 불태운다. 그래서 ‘정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에게 붙은 살벌한 이명은 주로 켕기는 게 있는 자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렇다면 선량한 사람들은 디케를 무어라 부를까. 유추하기 쉬울 것이다.
“흐악, 하, 크하……윽.”
“피로 속죄하시오.”
세상을 구하는 정의의 여신.
“죄목을 읊자니 끝이 없다오. 하여 특별 재판소의 대법관으로서 그대를 즉결심판하겠소.”
주위가 어두워졌다. 아니, 그렇게 보일 정도로 밝은 업화가 플랑베르주를 휘감았다. 영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꺽꺽대며 몸부림칠 뿐이었다.
작열통은 인간에게 가장 커다란 고통이라고 했던가. 틀렸다. 검으로 살을 헤집어놓아도, 불꽃이 피를 머금더라도 그가 삼켜온 혈루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악행이 불러온 쓴맛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오.”
영주가 쌓아놓은 보화는 주인과 함께 재로 화했다. 디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문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다음으로 올 높으신 분께서는 이런 유감스러운 일을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는 율법을 수호하는 자다.
그의 검로는 정의를 그린다.
그의 눈에 닿은 불의는 한 줌 회신이 되리라.
오늘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