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THE HANGED MAN 매달린 사람
올리버 포그
모모
올리버 포그가 사는 이곳, 독무 애체한 거리는 해가 나지 않는다.
아주 잠깐 눈꺼풀을 덮었다가 드러내면 안개로 잠식된 거리가 시선 속으로 가라앉는다. 일상이자 곧 위협이 되는 독무는 런던 시민에게 모순적 존재로 일생에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그것을 두려워 않는다. 안전 불감증의 표본? 틀렸다. 안일한 생각이 사로잡아 안전 불감증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겐 명백한 근거가 존재했었다. ‘포그워커’라는 방위의 실재. 그런 실재를 현재 독차지 중인 포그워커는 올리버 포그이올시다.
오후 여섯 시가 되면 런던 일대는 몇 초 동안 빅밴 종소리로 메워진다. 종소리가 끝을 맺으면 바로 뒤따라 문고리가 잠기는 소리가 이어진다. 철컥. 실존하는 유일무이 포그워커, 올리버 포그는 여섯 시 정각이 되면 퇴근하는 이른바 칼퇴 공무원. 퇴근 이후에는 어떠한 추가 근무도 받지 않는다(이 점은 휴일에 더욱 부각되었다). 통상적으로는 항상 그랬다. 예외가 없던 이 방침을 깨는 그 사건이 있지 않은 이상. 덕에 절대 깨지지 않는다던 말은 거품이 되어 공개 중 안개와 뒤섞여 행방이 묘연해졌다.
때는 티타임 시간. 근무 중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올리버는 아주 선호했다. 그도 그럴게 티타임을 즐기는 것과 상응하는 클래식을 찾는 것은 영국 월급쟁이들에겐 필수적 덕목이었으니까. 오늘도 아주, 정말 태평하게 그런 일과를 보낼 셈이었다. 그럴 셈이었는데…….
“…그래서 나한테 그 일을 맡기고 싶다고?”
“응, 부탁해. 올리버.”
네가 아니면 이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 뒤에 따라붙는 활자는 귓가에 맴돌다 금세 자리를 잃고 떠난다. 구태여 그 문장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보나마나 안개와 관련된 일이겠지. 그런 류의 일이 아니면 내가 유일하다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올리버는 느리게 눈꺼풀을 아래로 내려 눈동자를 반쯤 덮었다. 빛에 반사되던 안광은 힘을 잃었고 입 밖으론 대답 대신 무언의 한숨을 토로하기 바빴다. 퇴근 시간까지는 남았으므로 지금은 근무 시간이 맞다. 그렇지만 버틴 씨가 언급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티타임 시간을 빼앗기거나 퇴근 시간을 빼앗기는 것 말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정적이 이곳을 메운다. 위에서 아래로 차분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정적을 대신했다.
버틴 씨, 난 야근 같은 거 안 해. …알고 있어. 내 멋대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자각은 하고 있구나 따위 생각을 뇌리에서 만들고 뱉어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문장을 입술 위로 얹는 건 예의가 아니지. 불만이 가득한 혀 아래로 다시 토로할 수 있을 법한 활자들을 골라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내 규칙에 예외는 없어. 단 한 번도 예외를 만들지 않거든. 미안, 거절할게. 예의를 논했으면서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거침없는 거절 이야기였다. 너무 단호했나? 올리버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이 상황에 무안함을 느꼈다. 설마 하니 상처를 입은 건 아니겠지. 그녀에게 이 활자가 어떤 감정이 동반해 느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화자의 특권이자 불필요한 권리다. 탁, 타닥. 투명한 창문에 방울이 튕긴다. 여전히 이 공간은 빗소리가 메웠다. 조용하네, 정적이다.
“……역시 그렇겠지. 귀중한 시간 뺏어서 미안.”
티타임 시간 보상은 착실히 해줄게, 걱정 마.
답지 않게 버틴의 응답에 멍하니 굴었다. 그녀가 흔쾌히 거절을 받아들여주었다. 마음 속에서 파도가 일렁거린다. 어떤 포말이 마음속을 방문했는지 모른다. 몇 초, 아주 짧게 오롯이 그녀를 시선에 담았다. 무슨 낯으로 그녀가 나를 바라볼까. 잘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마 이건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올리버는 고개를 주억인다. 양해해 줘서 고맙군, 버틴 씨. 예상컨대 버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을 확인했을 것이다. 티타임이 끝나기까지 10분. 아슬아슬하게 차 한 모금은 넘길 수 있으려나.
올리버는 회중 시계를 꺼내 들어 초침이 움직이는 형태를 구경했다. 달칵. 원래 자리로 복귀시켜둔 뒤 발걸음을 옮긴다. 그쪽에 앉아있어줘, 버틴 씨. 차를 타올게. 클래식이라면…… 오늘은 차이코프스키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 달콤한 꿈, Op.39에 넘버 21로 부탁해. 잠깐이면 되니까 음악을 충분히 즐겨둬. 그녀가 문장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한 것 같으나 진작에 그곳에선 벗어난지 오래다. 무슨 차가 좋을까. 감정을 지우기 위해 부재중이던 잡념을 깨웠다.
잘그락 잘그락. 찻잔과 그를 받쳐주는 접시끼리 부딪혀 특정음을 내놓는다. 부드럽게 주위에 퍼지는 클래식과 어울렸다.
“미안, 기다렸을까? 다과는 앞에 있으니 먹어도 좋아.”
“기다리지 않았어. …고마워, 올리버. 친절하구나.”
“별로. 당연한 예의지.”
이 말을 기점으로 다시 둘 사이에 적막이 흐른다. 조용한 티 타임도 나쁘지 않지. 애당초 내 여유를 되찾기 위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런 합리화가 머릿속에서 종료될쯤 버틴이 찻잔을 내려두고 시선을 올리버에게 맞춘다. 정직하고 올곧은 눈빛, 그리고 상대에게 묘한 기대감을 바라는 듯한 눈동자. 과연 타임키퍼란(이때 올리버는 해당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느꼈다). 달궈진 찻잔 겉을 손가락으로 쓴다.
맞아, 올리버. 이 일은 아마 네가 없어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난 정식으로 네게 일을 부탁하고 싶어.”
아까 분명 매몰차게 거절한 기억이 뇌리 어딘가에 살아숨쉬고 있다. 애당초 타인이 할 수 있다면 타인에게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구태여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는 걸까. …그래도 물어는 볼까.
“그 말인즉슨 누구도 무관하다는 이야기네. 왜 나야?”
찻잔에 담긴 차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형태가 차 위로 유랑한다. 작은 고민이 담긴 앓는 음.
“……그거야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 런던의 유일한 포그워커인 네가 세상에 전하는 다정이 필요한 일이니까.” 분명히 너라면 다정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누군가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그런 일들 말이야.
버틴은 아무렇지 않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이었다. 길고 굵게 그녀를 접한 적은 없지만 두어 번씩 들려오는 소문이나 눈에 몇 번 밟혔던 행위들을 조합해 보면 해당 결과를 낼 수 있었다. 다정, 희망. 온갖 긍정으로 칠해진 단어 묶음. 끝이 쳐진 눈매가 알아볼 수도 없게 펴졌다. 동그랗게 뜬 눈은 온전히 보라색 눈동자를 담고 있었다. 단어 두 개를 입속에서 몇 번 굴린다. 정말로 하는 소리인가? 내가 다정을 알고 희망을 전한다고? 내 일은 단지 의무에 얽힌 것뿐이다. 타인을 위한다던가 영웅 심리라던가 그런 따스한 요소가 아니었는데.
일을 사랑하는 것도, 이타심도 아니다. 그저 포그 가문의 아들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다. 업무에는 사적인 감정이 배제된다. 영향을 끼치는 건 알지만 심리적 영향이 끼칠 거라곤 생각 못했다. 근거 없는 말의 진위 여부 파악은 어렵다. 거짓말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래도 올리버는 이 문장을, 단어를, 활자를 신뢰하고 싶었다. 신뢰로 마음을 기울이고 그녀의 다정 또한 차에 함께해 목 뒤로 넘기고 싶었다. 일전에 속에서 파도가 일렁이던 것은 이 탓이었나. 찻잔을 손에 쥔다. 아직 식지 않아 열기가 남은 차를 한 모금 혀 뒤로 밀어넣었다. 그녀도 비슷한 동작을 행했다. 여전히 스피커에선 넘버 21 클래식이 흐르고 바깥은 여전히 안개와 비로 가득했다. 타임키퍼는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주도 있는 것일까.
“하아. …버틴 씨. 추가 근무는 이번뿐이야.” 유감일 수도 있지만 다음은 안 돼.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첨언했다. 그녀가 의중 파악을 위해 간극 아무런 언질이 없었으나 금방 알아차렸는지 옅게 입꼬리에 호선을 그렸다. 고마워. 짧은 답신. 그러나 진실된 감정이 함유된 세 단어. 고마워해야 할 쪽은 그녀가 아니라 나 아닌가. 덕에 나는 용기에 맞설 수 있었다. 내 일의 의미를 알았고 희망과 다정의 무게를 깨달았다. 진득하게 고마워 해야 할 시간이지만 감사 인사를 하기에는 티 타임 시간이 갈무리되어간다. 감사 인사는 후에 전해야겠어. 빈 손이니 런던의 유명한 제과점에도 한 번 들려야겠다. 고마워, 버틴 씨. 다정이 온기에 스며든 네게 세상이 좀 더 물렀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