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JUDGEMENT 심판
버틴
알타이르
나와 소네트를 비롯한 동료들이 긴 임무 끝에 아페이론 섬에서 재단 본부로 돌아왔다. 특히 아페이론 섬을 빠져나오며 겪은 고된 과정에 정신과 신체 양면으로 많이 지쳐 있어서 그런지 모두들, 심지어 소네트마저도 휴식을 취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 또한 며칠간은 좀 쉬고 싶었지만, 나는 곧바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타임키퍼 소대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프로파일링이다.
「폭풍우 개혁: 증원과 질서」 법안이 통과되면서, 소대원 증원 결정과 예비 소대원 선택은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재단 지도부에서는 새로운 소대원들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기 전 예비 소대원에 적절한 심사와 마도학 윤리나 재단의 규정 등에 관한 교육을 요구했다. 재단의 요구사항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도 우선 소대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기초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프로파일이 필요하다. 프로파일의 준비가 늦어지면 그 만큼 예비 소대원이 진행해야 할 절차들이 지연되고, 그만큼 불편한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나는 이런 상황을 가급적 피하고 싶다. 그래서 여독 때문에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사무실에 앉아 프로파일링을 해야 한다.
프로파일링의 기초가 되는 것은 재단에서 진행하는 개인 면담과 본인이 작성한 서류 정보지만, 실제로 근간을 이루는 것은 바로 출장 중에 수집한 활동 기록이나 현장 자료다. 증빙 자료를 붙여야 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내가 쓴 일기도 큰 도움이 된다. 서류 정보는 아직 넘어오지 않았고, 개인 면담은 일정 조율 중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일기를 비롯한 활동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 내가 프로파일을 써야 하는 것은 37과 6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두 명 뿐이어서 할 일이 적을 것 같다. 일단 전달받기로는 6의 개인 면담이 37보다 더 빠르다고 하니, 일단 6의 프로파일링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서랍에서 프로파일링 양식을 한 부 꺼내 첫 페이지를 열었다. 첫 페이지는 그 사람의 기초적인 항목을 기재하며, 동시에 데이터베이스에 올라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진은 사무실로 복귀하면서 받아 왔기에 곧바로 양식에 붙였고, 그 옆의 이름이나 성별, 나이와 같은 항목들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채웠다. 금새 첫 페이지에 당장 채울 수 있는 것을 다 채웠고, 나는 다음으로 할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을 하던 즈음, 누군가 사무실 문에 노크를 했다. 나는 사무실 문 쪽으로 향해 누구인지 확인했다. 역시 소네트다. 피곤한데 여기 왜 왔냐고 물으니, 내가 혼자 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피곤하지만 도와주려 찾아왔다고 한다. 역시나 안색이 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소네트의 의지가 정말 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일을 하기로 했다.
소네트에게 현장 자료 분류를 부탁한 후, 나는 일단 지금까지 쓴 일기들에서 중요한 부분을 정리하기로 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부분은 페이지 숫자와 줄 번호를 적어 놓는데, 나중에 다른 자료와 교차 검증을 할 때 편하게 하기 위함이다.
일기를 첫 페이지부터 펼쳐보기 시작했다. 노트 앞 쪽은 지난 작전에서 이미 살펴봤기 때문에, 밑줄과 형광펜 마킹이 있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마킹이 되어 있지 않은, 이번 임무에서 작성한 일기를 찾았다. 대략 십수 페이지를 넘기니, 아무 마킹도 없는 페이지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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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곤 해협을 항해하던 도중 심한 폭풍과 바다 괴물의 습격을 받았고, 이에 기동 부대 ‘면도칼’을 호출했으나 바다 괴물의 공격으로 탑승하던 APPLe II호가 격침, 바다로 추락하여 표류했다.
이후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어느 섬에서 정신을 차렸다. 37이 나에게 다가와 올해가 2007년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 섬은 ‘폭풍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 안가 소네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나타났고, 그와 동시에 6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행동 습성을 보았을 때, 이 집단에서 중책을 차지하거나 지도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우리 일행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허수: ‘면도칼’ 대원들.
실수: 나머지 전원.
정수: 나(버틴), 소네트, APPLe.
분수: 릴리아, 미스 라디오
무리수: 레굴루스
이 분류에 어느 기준이 있는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단체에서 ‘허수’는 관심 대상이 아니며, ‘무리수’는 매우 천대를 받는다는 것이다. 레굴루스는 이들에 의해 바다로 던져질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동굴 감옥에 투옥되는 선에서 끝났다.
마땅한 통신 수단과 이동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당분간 이 섬에서 머물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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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페이론 섬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을 꼽자면,, 그 무엇보다도 숫자를 이름처럼 사용하는 풍습을 꼽을 것이다. 이들은 정수를 가장 좋은 것으로 치며, 정수의 비율인 분수를 그 다음으로 치는 것으로 보인다. 정수의 비율로 나타낼 수 없는 수인 무리수는 최악으로 여기며, 허수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수는 수일 뿐인데, 도대체 왜 이들이 수를 이렇게 신성시하는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소네트에게 아페이론 학파의 교리를 정리한 자료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소네트는 아페이론 학파의 교리를 공부하며 메모했던 노트를 나에게 주었다. 소네트의 필기를 훑어 보니 이들의 교리의 윤곽이 잡혔다. 역시 소네트의 필기는 명불허전이다.
나는 소네트에게 자료 정리를 잠깐 멈추고, 먼저 아페이론 학파의 교리를 문서로 정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페이론 학파의 구성원을 이해하려면 그 무엇보다 아페이론 학파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소네트에게 교리 정리를 요청한 이유는 소대 내에서 교리에 대해 (37과 6을 제외하고)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소네트이기 때문이다. 학파의 교리에 대해서 정리를 마친 후, 곧바로 37과 6에게 교차 검증을 요청하기로 했다.
나는 그 동안 소네트가 하던 자료 정리를 이어갔다. 자료는 생각보다 많았다. ‘면도칼’ 대원들의 활동 내역부터, 임무에 파견되었던 각 대원들의 활동 기록, 재단의 관측 기록 등… 자료 정리만으로도 한 세월은 걸릴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소네트에게 혼자 맡기기에는 너무 많은 양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네트가 교리 정리를 마치면 곧바로 자료를 받아 프로파일링을 이어갈 계획이었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어느덧 저녁 시간이다. 다행히 소네트가 때마침 교리 정리를 끝내서 때맞춰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나와 소네트는 사무실에서 나와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일이 바쁠 때에도 그나마 쉴 수 있는 때가 바로 식사 시간이지만, 오늘은 일이 너무 바쁘다 보니 식사 시간에도 오롯이 프로파일링 생각 뿐이었다. 이따금씩 소네트와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결국 일 관련으로 귀결되었다.
빠르게 밥을 먹고, 나는 소네트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녁 시간도 끝이 났으니, 다시 일로 돌아갈 시간이다. 다시 자리에 앉아서 프로파일링을 이어갔다. 이제 일기 하나를 해석했으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일단 교리 정리본이 있으니, 이제 일기와 교리를 비교 분석하면서 프로파일링을 이어가면 된다.
아페이론 학파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직계 후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닮아 있다. 만물은 숫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숫자 - 특히 정수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 그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들이 무리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무리수에 대한 취급은 피타고라스 학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무리수를 취급하는 방식은, 본부로 귀환할 때 레굴루스가 했던 각종 타령만 들어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물론 이를 프로파일링 자료에 올리려면 여러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이 페이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은 것 같으니, 다음 장을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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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의 거주민들은 자신들을 ‘아페이론’ 학파라고 소개한다. 이 섬은 바깥 세계와 고도로 격리되어, 고유의 문화와 정치 체제를 유지해오고 있다. 아페이론 학파의 상황을 보자하면 고대 그리스와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섬에는 이름이 없다. 아페이론 학파의 사람들에겐 이 섬이 곧 세상의 전부이다. 이 섬 밖의 모든 것은 다 ‘외부 세계’라고 불린다. 외부 세계와 자신들이 사는 섬 2개의 분류 밖에 없으니, 굳이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편의상 이 섬을 ‘아페이론 섬’이라고 부르겠다.
6은 우리들에게 이 섬에서 퇴거할 것을 요청했다. 추정하기로는 이 섬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상황 자체를 꺼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동 수단 또한 제시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자니, 이 섬이 현재 연도를 1913년이 아닌 2007년으로 인지한 것 - 즉, ‘폭풍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어쩌면, 여기서 폭풍우 관련 중요한 자료를 찾을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래서 학회에 참석할 수 있는지 질문했더니, 다행히 승낙되었다. 대신, 발언할 수 없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들은 일관되게 ‘폭풍우’를 ‘유출’이라고 부른다. 재단은 물론 재건과도 관계 없이 독자적으로 ‘폭풍우’를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학술적 가치가 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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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섬에 도착한 첫 날의 일기가 끝이 났다. 새로운 환경이었던 만큼 아마 최대한 많은 것을 적었었을 것이다. 나는 일단 차근차근히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꽤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써내려간 만큼 두서가 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읽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렸다.
한 20분이나 지났을까, 첫 날 일기의 정리가 끝났다. 프로파일링 자료에 올려야 할 토픽은 크게 2가지이다. 첫째는 아페이론 학파 그 자체이고, 둘째는 이들이 고유적으로 연구한 ‘폭풍우’, 그들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유출’에 대한 이론이다. 이 두가지가 정리되지 않으면, 프로파일링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소네트와 함께 칠판에 이런저런 것들을 메모해 가며 이들의 ‘폭풍우’ 이론을 정리했다. 아페이론 학파의 ‘폭풍우’ -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유출’ - 이론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복잡하지만, 그 본질은 재단의 ‘폭풍우’ 이론과 꽤나 흡사했다. 어떤 면에선 우리가 아페이론 학파에게 배울 부분도 있었다.
다만 아페이론 학파는 ‘폭풍우’가 물리적 실체에게 영향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도 이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폭풍우’가 물리 세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재단 또한 1966년 폭풍우 당시에야 그 존재를 예견했고, 1929년 폭풍우에서야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와의 교류가 극히 드문 아페이론 학파라면 이런 현상의 존재를 알기 어려울 것이 자명했다.
소네트와 논의한 끝에, 나는 아페이론 학파의 폭풍우 이론을 재단의 폭풍우 이론과 대조하는 방식으로 다루기로 했다. 다만 본격적인 작업은 슬슬 저녁 점호 시간이 다가오는 관계로, 다음 날 계속하기로 했다. 하던 일을 대략 정리하고, 나는 저녁 점호를 위해 자료를 정리했다. 소네트는 미리 내려가 소대원들을 인솔할 예정이다. 오늘 내가 저녁 점호에서 해야 하는 건 신규 소대원인 37과 6의 소개, 1인 1역 관련 안내 등 새로운 소대원들이 오면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 전부였다. 딱히 신경써서 준비해야 할 것은 없어서, 금방 준비를 끝내고 로비층으로 내려갔다.
강당에는 소대원들이 이미 다 모여 있었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더 빨리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일이 바빠서 좀 늦었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서류 한 페이지를 넘겨서 오늘 확인해야 할 부분들을 훑어 보았다. 빠르게 훑어본 후, 점호를 이어갔다.
“일단,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타임키퍼 소대에 새로운 소대원 두 분이 오셨습니다. 이름이 좀 특이합니다. 37과 6입니다. 앞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37와 6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37의 표정은 무난했지만, 6은 정말로 나오기 싫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억하기로 아페이론 섬에서도 6은 매우 내향적이었다.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혹시나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지 다소 걱정이 되었다. 37의 표정은 이것보다 더 밝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무래도 여기 오는 과정에서 겪은 사건들 때문에 우울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단 37에게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자신의 이름, 출신, 사회에서 하던 일, 관심사 등을 일목요연하게 이야기했고, 말미에 수학 관련 질문이 있으면 편히 물어보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요청했던 것 만큼 간단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좋은 자기소개였다. 이제 6의 차례인데, 6은 여전히 자기소개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꽤 긴 정적 끝에 드디어 6은 말을 꺼냈다.
“...6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너무 짧다. 6처럼 내향적인 사람에게 이 이상을 바라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얼굴을 보며 지낼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정보는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6에게 조금 더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6은 뜸을 들인 후 짧은 답을 이었다.
“음… 37과 같은 곳에서 왔습니다.”
여전히 불충분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이상을 요청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그래서 더 이상의 자기소개를 요청하지 않고, 그냥 자기소개 시간을 끝냈다. 이후로도 일상적으로 하는 주요 일정 브리핑과 인원 확인을 이어간 후, 저녁 점호를 마쳤다. 점호가 끝나자 다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레굴루스 같이 빠르게 방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어 쳐다보는데, 그 사이에 6이 끼어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게 꽤나 피곤했던 것 같다.
일단, 저녁 점호도 끝이 났으니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가야 한다. 나는 지금 당장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프로파일링을 빨리 해야 37과 6도 불편한 생활을 끝낼 수 있기에,. 피로한 몸을 이끌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저녁 점호 이전 계획했던 대로 소네트와 함께 아페이론 학파의 ‘폭풍우’ 학설을 정리하기로 했다.
소네트가 정리해 준 아페이론 학파의 교리와 그들의 계산 자료, 재단의 관측 자료를 번갈아 보면서 차근차근 이들의 학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진도가 나질 않았다. 기초적인 부분, 가령 이들의 ‘폭풍우’를 바라 보는 기본적인 시선이나 이들의 관측 및 계산 기록 같은 것은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순 없었다. 이들이 ‘폭풍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재단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재단의 ‘폭풍우’ 이론에 익숙한 우리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다.
몇 시간 동안 머리를 싸맨 나와 소네트는 일단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37과 6을 불러 질문해 보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시간을 쓰며 머리를 싸맨다고 뭐가 진전될 것 같진 않다. 일단 사무실을 대략 정돈하고, 사무실을 나와 침실로 향했다. 너무 피곤해서, 평소라면 할 자기 전 잠깐의 대화 겸 디브리핑도 생략하고 바로 씻은 후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머리를 대자마자 아침이 찾아왔다. 너무 피곤해서 곧바로 기절한 모양이다. 조금 더 자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타임키퍼 소대의 하루도 시작되지 않는다. 나는 피곤한 몸을 깨우며 오늘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시작했다. 정리정돈을 마친 후 방 문을 여니, 역시 눈 앞에 소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네트와 아침 안부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사무실로 출근해 아침 점호를 준비했다.
오늘은 딱히 전달할 사항도 없고, 내가 할 것도 프로파일링 외에 없었으므로, 금방 준비를 끝내고 로비층으로 내려갔다. 오늘도 대부분의 소대원들이 미리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몇몇 빈 자리가 눈에 띄었다. 살짝 둘러보니 레굴루스와 호러피디아가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드문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우러 다니기엔 이미 나와 있는 대다수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다. 일단 이 둘은 나중에 찾기로 하고, 아침 점호를 진행했다.
아침 점호를 막 시작할 즈음, 저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역시 자리에 없던 둘이었다. 나는 둘에게 다음에는 일찍 오라고 주의를 준 후, 아침 점호를 이어갔다. 평소처럼 인원 수를 확인하고, 밤 사이 있었던 일도 확인했다.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아 간단히 점호를 마치며, 말미에 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37과 6은, 아침 식사를 마치면 제 사무실로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둘은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전달할 사항도 없었으니, 그대로 점호를 마쳤다. 점호를 끝내자 몇몇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 갔고, 대다수는 아침을 먹으러 구내식당 쪽으로 향했다.
식당에선 대규모 출장을 다녀온 후 지당 있을 법한 대화가 오갔다. 출장지에서 있었던 일, 본 풍경이나 인상깊었던 장면, 느낀 점 등… 유달리 식당이 시끄러운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소네트와 함께 출장지에서 있었던 일을 나누었다. 소네트는 나오면서 겪은 혼돈스러운 경험과 별개로 지중해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며, 다음에는 출장이 아니라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나 또한 거기에 동감했다. 폭풍우가 잦아지는 만큼, 나 또한 휴가는 커녕 바쁜 스케줄에 치이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Z에게 부탁을 해 보겠다고 답했다.
아침 식사가 끝이 났다. 나는 식기를 정리하고 소네트와 함께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앞에는 이미 37와 6이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나는 사무실의 문을 열고, 둘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37의 질문에 나는 아페이론 학파의 사상과 관련해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답했다.
“...그래서 저도 부르신 거군요.”
6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인정의 뜻을 전했다. 분주하게 소네트와 함께 자료를 정리한 나는 구석에서 칠판을 가져와 본론을 꺼냈다.
“제가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아페이론 학파의 ‘폭풍우’ - 즉 ‘유출’과 관련해 질문 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말이 끝나자 37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반면 6은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지금까지 정리한 것들을 한 번 훑어본 후, 질문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정리한 것들의 확인성 질문으로 시작해, 나는 물론 소네트도 헷갈리는 이론적 내용도 물어 보았고, 나중엔 아예 37에게 직접 설명을 부탁하기도 했다. 6은 37의 뒤에서 설명을 보충해 주거나 몇몇 내용을 설명해 주는 등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설명 끝에, 얼추 프로파일링 자료에 올릴 만한 수준의 내용을 얻었다. 일단 자료를 정리하려면 몇 시간은 걸릴 것 같아서, 일단 37와 6을 돌려 보내기로 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궁금한 점이 다시 생기면, 그 때 따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말이 끝나자 6은 가볍게 인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고, 뒤따라 37도 나갔다. 나는 잠시 의자에 앉아 한 숨을 돌렸고, 소네트도 의자에 앉아 스트레칭을 했다. 시간은 어느덧 오전 11시. 점심 시간이 오후 1시였기 때문에, 잘하면 점심시간 전에 이들의 ‘폭풍우’ 학설에 대해 정리가 될 것 같았다. 곧바로 나와 소네트는 작업에 들어갔다.
37와 6의 도움 덕분에, 이전에 비해 진도가 월등히 빠르게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학설은 그 자체만을 보고서로 다뤄도 될 정도로 풍부하고 낯설었기 때문에, 나는 아예 새로운 보고서를 만들어 이를 별첨하기로 했다. 특히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면, 6의 요점 정리와 설명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점심 식사를 할 무렵 아페이론 학파의 ‘폭풍우’ 학설을 다룬 보고서의 초안이 완성되었다. 잠시 스트레칭을 하고, 바쁘게 일한 탓인지 곧바로 배고파져서, 곧바로 소네트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당은 평소처럼 분주했다. 사람이 유달리 적지도, 그렇다고 특별히 많지도 않았다.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고, 곧바로 소네트와 함께 식판에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도 바쁠 때면 점심 식사 때에도 둘은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눴었고, 오늘도 마찬가지로 식사 자리에서 프로파일링 관련 대화를 나누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 재단의 상담과 소대 차원에서 별개로 진행하는 대면 상담 등 프로파일링 그 자체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고, 소대 내의 위치 배정과 같은 부수적인 대화도 나누었다.
업무 브리핑과 함께 점심 식사도 끝이 났다. 나는 소네트와 함께 곧바로 사무실로 복귀해 업무를 이어갔다. 소네트는 어차피 별첨 보고서를 쓰기 시작한 김에 아페이론 학파의 교리와 규칙에 관한 별첨 보고서 또한 작성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 어차피 ‘폭풍우’ 학설에 관한 보고서를 쓰면서 학파의 교리와 규칙을 다수 정리하고 확인했으니 이 참에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동의했다. 해당 보고서의 작성은 교리에 대해 학파 외 인물 중에선 가장 잘 알고 있는 소네트에게 일임했고, 나는 그 동안 일기를 더 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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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페이론 섬에서의 이틀날이 밝았다. 재단과 계속 연락을 시도해 보고 있지만, 재단의 기술력으로는 망망대해에서까진 안정적인 통신을 얻을 순 없다. 가지고 온 통신 기기의 특성상 달빛이 적어야 안정적인 통신을 얻을 수 있으나, 현재는 상현달이 떠 있다. 그믐달이 뜨려면 최소 15일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아페이론 섬에서의 생활은 더 길어질 것 같다. 밤 사이 소네트와 함께 천체 측량을 통한 위치 추정을 시도했으나, 구름이 많아 쉽지 않았다. 오늘 또한 하루종일 흐렸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상당한 시간 동안 위치 추정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아페이론 학파는 과학기술적인 면에선 중세 수준의, 매우 뒤쳐진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도공학적 면에선 재단과 비교해 꿇리지 않는 수준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한편, 이들의 수학적 연구는 현대 수학 수준으로 매우 뛰어난 수준이다. 과학기술적 역량이 중세 수준이라는 것과 비교했을 때 매우 대조적이다. 이들이 외부의 소통 없이 수학적 연구를 이 수준으로 진보시켰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페이론 학파의 모든 구성원이 수학자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럼에도 외부 세계의 수학자의 수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는 아페이론 학파가 외부 세계(이들의 말에 따르면 ‘현상 세계’)와 일종의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실제로 이들은 ‘면도칼’ 대원들을 외부 세계로 돌려 보낼 선박편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당 선박편에 함께 타면 우리 일행 또한 복귀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우선 이들이 ‘폭풍우’에 대한 자체적인 학설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폭풍우를 다루는 ‘타임키퍼’로서 외면할 수 없다. 이들의 학설이 얼마나 진보했는지와 상관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재단보다 더 진보한 학설을 가지고 있다면 두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둘째로, 이들이 ‘폭풍우’에 자유롭다는 것이다. 재단은 아직 ‘‘폭풍우’ 면역이 발생하는 정확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비대칭 핵종 R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면역 항체 G가 있으면 ‘폭풍우’의 영향을 피한다는 경험적 지식이 있을 뿐이다. 이들이 ‘폭풍우’에 면역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로 면역을 실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라면 그야말로 횡재인 것이고,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페이론 학파는 마도학자로만 구성된 단체이기 때문이다. 마도학자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고립된 집단이라면 재건의 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재건의 목적을 고려해 보았을 때,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마도학자 집단은 재건이라는 세균에게 그야말로 배양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재건의 손이 아페이론 학파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들이 외부와 어느 수준의 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재건이 아페이론 학파를 인지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러모로 사정이 좋지 않다. 일단, 아페이론 학파의 지시를 따름과 동시에 재단과의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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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파악을 어느 정도 마친 이튿날의 일기다. 확실히 첫 날의 일기에 비해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난 현재 시점에서 고찰해 보았을 때, 꽤나 정확한 결과를 얻어낸 것 같다. 아쉽게도 이들이 폭풍우 면역을 의도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폭풍우 면역 연구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의 폭풍우 학설 또한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관측 기술은 재단에 비해 뒤떨어지지만, 이론적 분석과 예측 측면에선 재단보다 앞서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버틴의 보고를 들은 재단 수뇌부도 이들의 폭풍우 학설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재건의 손. 이들은 아주 높은 확률로 마도학자만이 존재하는 집단을, 그것도 재단보다도 더 빨리 찾아낸다. 그리고 이들의 공작을 사전에, 또는 초기에 진압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면 아주 높은 확률로 이런 집단의 결말은 파멸적이다. 심지어 그 집단 주변에 내가 있다면, 전반적으로 결과는 더 치명적이었다. 일기를 읽어 내려가면서 그 간의 고심과 걱정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야 모든 일이 끝나고 자료를 보며 회상하는 심정이지만, 그 당시에는 심정이 복잡했다. 나 혼자만 있으면 몰라도, 아페이론 섬에는 소네트와 릴리아, 레굴루스와 APPLe도 있었다. 다시 말해, 상황이 잘못되면 여럿의 목숨이 위태로워 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이 진짜 땅이 맞는지, 혹시 위력적인 마도술에 당해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이건 진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조차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생각이 복잡해지려고 한다. 잠시 숨을 돌리고, 차분하게 내용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다룰 내용이 복잡해 져, 일단 요약 정리를 위한 타임라인을 세우기로 했다. 날짜와 시간 별로 발생했던 사건, 관찰한 내용 등을 정리하는 것이다. 소네트도 이에 대해 동의했다. 소네트가 별첨 보고서를 완성하는 사이, 나는 일기들을 읽어 내려가며 타임라인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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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아페이론 학파에 대한 재건의 손의 개입이 확인되었다. 무려 아르카나가 직접 방문했다. 아르카나가 행동파 두목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오지까지 직접 방문하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아르카나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그만큼 재건의 손이 이곳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더 큰 문제는, 소네트가 아르카나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마도술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침묵을 유지해야만 하는 ‘진리의 강당’ 안에서. 당연히, 매우 치명적인 결과가 이어졌다. 침묵을 깬 죄로 소네트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집행 방법은 사사형. 죽음의 독주를 마시게 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비상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네트의 사형 집행을 막는 것이다. 이유는 당연하다. 소네트니까. 소네트의 존재가 나와 타임키퍼 소대, 재단에 주는 영향력은 막대하다. 그런 소네트를 잃는다는 것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일단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네트를 구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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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부분. 가장 긴장되고 떨렸던 순간이었다. 나 또한 이 상황에서 머리가 새하얘졌던 것 같다. 일기의 내용이 짧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이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재단에 복귀했고 당장 내 앞에서 소네트가 평화롭게 보고서를 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손에 땀이 났다. 그만큼 회상하기도 싫은 순간이다. 하지만 일은 일이다. 이 일도 보고서에 당연히 올라가야 한다. 다만… 다루는 것이 힘에 벅찰 뿐이다.
괜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소네트의 사형 선고부터 선고 철회까지의 일대기를 써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레굴루스의 탈출기 또한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써 올라오는 감정을 무시하며 타임라인을 써 나가다 보니,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났다. 소네트는 저녁 시간이 지난 것도 모른채 보고서 작성에 열중이었다. 저녁 식사 후에 바로 저녁 점호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나는 저녁 점호를 하고, 식사는 밖에서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곧바로 저녁 점호 준비를 마친 후, 로비층으로 내려갔다. 슬슬 소대원들이 모일 시간. 예상대로 소대원들이 정문 쪽에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들 저녁식사를 하고 온 것인지 표정이 여유로운 것 같다. 아침 점호와 다르게 소대원들이 제때 모였다. 아침 점호 때는 늦잠을 자는 소대원들이 종종 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다. 어차피 전달할 것도 없었고, 37과 6은 아침 식사 이후에 불러 전달할 것들을 다 전달했기 때문에 저녁 점호는 인원 확인 정보만 하고 빠르게 끝냈다.
각자의 방, 또는 각자의 할 일을 할 곳으로 돌아가는 소대원들의 발걸음을 뒤로 한 채, 나와 소네트는 지금은 구내식당이 쉴 시간인 관계로 재단 단지 밖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재단 정문으로 나오니 햄버거 가게가 눈에 들어와, 저녁은 햄버거로 정했다. 굳이 햄버거 가게에서 밥을 먹을 거면 포장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소네트에게 포장해 갈 것을 제안했다. 소네트는 그게 더 나을 것 같다고 답했고, 나는 그대로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 세트를 포장해 왔다.
사무실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 손에 햄버거를 들고, 느긋하게 일기를 읽으며 타임라인을 다시 채워나갔다. 어차피 지금 쓰는 타임라인은 메모 용도이고, 정식 보고서에 들어갈 타임라인은 이것보다 더 정제된 형식이 될 것이니, 더러워지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소네트는 보고서 쓰는 걸 멈추고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잠깐의 저녁 식사가 끝이 난 후, 다시 업무로 돌아왔다. 며칠 정도의 일기를 읽어 내려가며 타임라인을 계속 써내려가니 여정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충 보니, 소네트도 보고서 초안을 거의 다 쓴 것 같았다. 탕약 사탕을 하나 입에 물고, 다시 힘을 내서 타임라인을 계속 써 내려갔다. 그렇게 열심히 힘을 낸 결과, 오후 10시 쯤 되어 타임라인과 아페이론 학파의 교리를 담은 별첨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오늘은 이만 하기로 하고, 나와 소네트는 사무실에서 나와 침실로 돌아갔다. 오늘만큼은 대화 겸 디브리핑을 하기로 했다. 논의할 것이 좀 있기도 했고, 며칠 정도 이걸 생략하니 할 말이 너무 많아 오늘만큼은 꼭 하기로 했다. 소네트도 비슷했는지, 씻고 나오자마자 내 침실로 달려와 의자에 앉은 소네트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녁에 먹었던 햄버거의 평가부터 시작해서, 오늘 하루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 등이 화두가 되었다. 겸사겸사 내일 할 일도 정리했다.
슬슬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소네트의 눈꺼풀도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대화를 끝내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소네트가 방을 나가자마자, 나는 전등을 끄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참으로 바쁜 하루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알람시계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너무 피곤했지만, 그래도 아침 점호를 해야 하기에 씻은 후,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침실에서 나왔다. 오늘도 소네트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사무실로 향한 나와 소네트는 아침 점호 준비를 마친 후, 곧바로 로비층으로 내려갔다. 아주 오래간만에, 모두가 로비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전달할 사항은 딱히 없다. 조만간 37와 6의 인터뷰를 진행할 것 같지만, 그게 오늘이 될 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비록 모두 나오긴 했지만, 다들 졸린 눈빛이었다. 나는 빠르게 인원 확인과 형식적인 절차를 끝낸 후, 아침 점호를 마쳤다. 점호를 끝내자마자, 몇몇은 침실로, 몇몇은 식당으로 흩어졌다. 나와 소네트 또한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를 빠르게 마친 후, 소네트와 함께 나는 다시 사무실로 출근했다. 어제 약속한 것처럼, 일단 타임라인을 정리하기로 했다. 소네트와 함께 타임라인을 보며, 우선 잘못 적은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대략 30분 정도 확인하니, 단순 오탈자만 있었을 뿐 내용에 문제는 없었다. 1차 검수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타임라인을 정형화하기로 했다.
서랍장 한 켠에서 타임라인 작성 양식을 잔뜩 꺼냈다. 백지에 휘갈긴 타임라인 초안을 양식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다시 이를 최종 보고서에 올릴 생각이다. 몇 차례 타임라인을 써 보니, 이게 가장 효율적이고 오류가 적었기 때문이다. 타임라인을 옮겨 적는 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양식에 맞춰 보기 좋게 정리하는 것은 소네트의 주특기이기 때문에, 소네트에게 부탁했다. 나는 그 사이, 기존 보고서에 따라 넣어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 작성했다.
한 시간 만에 소네트는 타임라인 정리를 끝냈다. 살짝 보니 내가 휘갈긴 것보다 역시 깔끔했다. 한 번 꼼꼼히 살펴봤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어, 소네트에게 타임라인은 이것 그대로 싣는다고 했다. 그 말에 소네트는 한번 더 살펴보겠다고 말하고는 타임라인을 다시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 보고서 초안의 틀을 잡기 시작했다. 복잡한 타임라인과 상당한 양의 별첨 보고서 등으로 인해, 평소라면 그 출장으로 포섭한 마도학자들을 한 보고서에 싣었겠지만 이번에는 별개의 보고서로 제출하기로 했다. 타임라인도 별첨으로 빼는 것이 낫다 판단하고, 소네트에게 타임라인은 별첨으로 첨부하겠다 언급했다. 소네트는 문제 없을 거라고 답했다.
점심 시간이 될 무렵, 소네트는 타임라인 검토를 끝냈다고 보고했다. 그 사이 내가 찾지 못한 오류를 몇 개나 찾아냈다. 소네트의 세밀한 눈썰미는 역시 나보다 좋은 것 같다. 뭔가를 더 하기엔 점심 시간에 너무 가까워, 그냥 쉬다가 점심을 먹고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나는 일단 소네트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간단히 정리했다. 별첨 타임라인을 정리하고, 사용된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태그를 달아 주석 처리한 후, 인터뷰를 진행하고 보고서를 완성하면 정말 쉴 수 있다고 말하니 소네트의 얼굴이 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온 후, 사무실로 돌아온 우리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소네트가 별첨 타임라인을 정리하는 사이, 나는 사용된 자료들을 한데 모아 종류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일기, 현장 사진, 통신 이력 등… 정리에만 몇 시간이 걸렸다. 소네트 중간에 별첨 타임라인 정리를 끝내고 와서 도와주긴 했지만, 여전히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고 판단했다.
점심을 먹고 온 후 시작한 자료 정리는 저녁 식사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자료에 일일히 태그를 붙이고, 번호를 부여하고, 담긴 내용을 요약한 뒤, 각 자료를 보존 처리한 후 분류 상자에 담아 포장까지 마쳐야 하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자명했다. 저녁 점호 준비를 마친 후,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소네트와 나는 식당 구석의 조용한 자리에 앉아 37와 6에게 인터뷰를 할 때 어떤 주제를 다뤄야 할 지 간략하게 상의했다. 상의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식사가 오래 걸렸다. 나는 소네트에게 로비층에서 점호를 기다리고 있을 소대원들을 대기시킬 것을 부탁했고, 그 사이 나는 빠르게 사무실로 달려가 점호 자료를 가져왔다. 다행히 오래 걸리진 않았다.
오늘 저녁 점호 또한 아침 점호와 마찬가지로 전달해야 할 사항은 적었다. 다만, 37와 6에게 내일 인터뷰 일정을 전달해야 했다.
“오늘 저녁 점호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인원 확인을 하겠습니다.”
나는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소대원들이 많아져서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는 것만 해도 몇 분이나 걸렸다. 다행히 결원은 없었다. 인원 확인을 끝낸 이후,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공지사항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음… 일단, 내일 소대 본부의 소방 설비 점검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화재경보기가 울릴 수 있습니다.”
버틴은 아래 문단의 공지사항을 읽었다.
“또, 내일부터 재단 내 글쓰기 공모전 접수가 시작됩니다. 논설, 수필, 시 3개 분야로 접수를 받습니다. 자세한 것은 소대 본부 내 게시판을 참조해 주시면 됩니다.”
모두, 특히 소네트의 시선이 게시판에 꽂혔다. 다들 공모전 포스터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대략 나에게로 돌아온 후, 공지사항 전달을 마치고 점호를 끝냈다.
“특별히 공지 드릴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37과 6은 남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두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 푹 쉬시고, 내일 봅시다!”
말이 끝나자 37과 6, 소네트와 나를 제외한 모두가 흩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37와 6에게 인터뷰에 관해 전달했다.
“중요한 내용을 전달드리겠습니다. 내일 중으로, 두 분의 프로파일링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두 분을 정식 소대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절차입니다.”
37와 6은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일단 37부터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아침 식사가 끝나는 대로 제 사무실 앞으로 와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 다음에 6 인터뷰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아마도 점심 식사가 끝나면 진행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 진행할지는 모르니, 대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둘은 이해했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공지사항은 이걸로 끝입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37와 6은 가볍게 인사한 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와 소네트 또한 사무실로 돌아갔다. 인터뷰는 내일 진행할 예정이었고, 이제 질문만 구성하면 된다. 질문도 절반이 공통 질문이고, 37와 6이 모두 아페이론 학파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인 질문도 겹치는 구석이 많아 실질적으로 쓸 질문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소네트와 함께 보고서 초안, 정리한 타임라인,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쓴 메모 등을 참고하면서 개인 질문 목록을 작성했다.
질문 목록은 금방 완성됐다. 이제 오늘은 할 일이 없었다. 추가 작업은 인터뷰를 진행해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카페에서 음료나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로 했다. 모처럼 찾아온 달콤한 휴식에 나는 물론 소네트의 얼굴도 밝은 것 같았다. 오늘은 구내식당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기로 했다. 지금쯤이면 식사 시간도 한참 지났고, 식후 커피를 마시는 직원들이 한바탕 빠져나갔을 때라 사람이 적은 편이고, 오늘도 그랬다.
시간이 좀 늦은 편이라, 일찍 자기 위해 오늘은 커피가 아닌 음료를 시켰다. 나는 오래간만에 슬러시를 시켰고, 소네트는 평소처럼 차를 시켰다. 사람이 한산해서 그런지, 오늘은 거의 시키자마자 음료가 나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겸사겸사 자기 전 브리핑도 했다. 오늘 있었던 사소한 일들, 37와 6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등이 화두에 올랐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10시. 오늘은 일찍 자기로 했다. 자기 전 브리핑은 카페에서 했으니, 각자의 방에서 씻고 곧바로 잠에 들었다.
어제 일찍 자서 그런지, 오늘은 좀 더 몸이 가벼웠다. 물론 더 자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 소대의 하루도 시작되지 않는다.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마친 뒤 방 문을 열었는데, 소네트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었다. 혹시 내가 늦잠을 잔 것인가 싶어 시계를 다시 봤지만, 딱히 늦지는 않았다. 살짝 고민하다가, 왠지 소네트의 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방문을 열어보니, 소네트가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늦잠을 잔 것 같았다.
늦잠을 잔 것에 연거푸 사과하는 소네트를 달래며, 오늘도 사무실로 출근했다. 오늘은 37와 6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고, 인터뷰가 끝나면 약간의 작업 후 드디어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다. 슬슬 이 프로파일링 일대기에 끝이 찾아오고 있었다. 프로파일링이 끝나면 쉬면서 무엇을 할 지 기대감을 품고, 오늘 아침 점호를 준비했다. 준비를 끝내고 아침 점호를 하러 로비층에 내려가니, 얼추 올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았다. 소대원들 앞에 서서 아침 점호를 시작했다.
“아침 점호를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모두 오셨는지 확인하겠습니다.”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자주 지각하던 소대원들도 모두 나와 있어서, 점호는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나, 37이 자리에 없었다.
“37? 자리에 없는 것 같은데…”
어디를 둘러봐도 37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6이 자리에 나와 있었기에, 6에게 37의 행방에 대해 물어봤다.
“6, 혹시, 37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아… 그…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데, 배탈이 심하게 난 것 같아 의무실로 데려갔습니다. 아침 점호가 촉박해… 전달드리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제가 한번 찾아가 보겠습니다.”
37이 여기 온 지 딱 3일 된 걸 감안하면, 지금 37은 물갈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딱히 큰 일은 아니다. 속앓이를 하고, 재단 환경에 적응하고 나면 금방 해결될 것이다. 소대에 처음 들어온 소대원들 중 일부도 겪은 일이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긴 할 뿐더러, 소대장으로서 소대원들의 상태를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기에, 아침 식사 전에 37을 찾아가기로 했다.
“맞다, 그러면 어제 말씀드린 인터뷰는 6부터 진행하겠습니다. 아침 식사 끝나고 바로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37의 신변이 확인된 후, 나는 다시 점호를 이어갔다. 다행히 37 외에 빠진 사람은 없었다. 딱히 지금 전달해야 할 상황은 없어서, 점호가 좀 지연된 것을 감안해 빠르게 점호를 끝내기로 했다.
“딱히 지금 전달드릴 사항은 없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말이 끝나자, 평소 아침처럼 소대원들은 아침을 먹으러, 나머지 잠을 청하려 흩어졌다. 나는 소네트와 함께 의무실에 가 보았다. 의무실에 가보니, 37이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37의 표정은 썩 좋은 것 같진 않았다. 물론 배탈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만, 아페이론 섬을 나오면서 겪은 일들의 영향도 없지않아 있었을 것이다. 37에게 간단히 안부를 물어본 후, 인터뷰는 일단 무기한 연기할테니, 푹 쉬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사무실에서 6의 인터뷰를 준비했다. 질문지를 깔끔하게 준비해 놓고, 인터뷰이에게 제공할 다과도 마련해 놨다. 오래간만에 사무실 안에 마련한 상담실의 문을 열고, 소네트와 함께 청소를 마쳤다. 다과를 옮겨 놓고, 질문지를 들고 상담실 자리에 앉으니 때마침 6이 도착했다. 소네트가 6을 사무실로 안내했고, 6은 사무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6이 자리에 앉자, 나는 녹음기를 키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십니까.”
“자,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인터뷰는 프로파일링 등을 위해 녹음 및 녹취됩니다. 별다른 건 없고, 질문 몇 가지만 드리는 것이니 편히 대답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질문지를 넘기고, 공통 질문을 시작했다.
“일단… 재단에 처음 왔을 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음…”
6은 뜸을 좀 들인 후 답변했다.
“별 생각 없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정말로 없었습니다. 그냥, 새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잠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질문을 이어갔다.
“재단 분위기에 적응은 되셨습니까?”
“음… 어느 정도 분위기는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자연스러운 느낌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불편하신 부분은 있으십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적응은 빠른 37에 비해, 6은 아직 적응이 덜 된 듯한 모습이다. 6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두 질문은 워밍업 성격의 질문이었고, 이제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음… 일단,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가겠습니다. 재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별 생각 없습니다. 그냥… 제 새로운 소속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생각은 없으십니까?”
“정말로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그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사실… 여기 온 것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아페이론 섬을 빠져 나오면서 있었던 일은 비단 나와 소네트를 비롯한 재단 사람들에게도 충격이었지만, 아페이론 학파의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세계가 멸망하는 수준의 충격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나 아페이론 학파의 중추를 담당하던 6에게는 충격이 더 컸을 것만 같다. 내 판단으로는, 6은 지금 상황을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다.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조직, 다시 말하자면 ‘타임키퍼 소대’에 소속되면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셔도 좋고, 정 생각나지 않으면 답변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6은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몇 분, 몇 십 분이라도 기다려 줄 심정으로 자세를 풀고 기다렸다. 6은 1분 정도 생각을 한 후, 나에게 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더 적응돼야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가지 공통 질문이 더 있긴 하지만, 딱히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아 생략하고 개인 질문으로 넘어갔다.
“좀 더 세심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음…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고 싶습니다. 아페이론 학파를 떠나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음……”
6의 장고가 길어졌다. 이해한다. 37과 6이 아페이론 학파를 떠나며 겪은 일의 충격을 경험한다면 쉽사리 답변하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꽤 오랜 정적 끝에, 6은 답했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연연하지는 않습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아페이론 섬에 있을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대의를 챙겨야 하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세다. 나 또한 타임키퍼 소대라는 단체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방금 발언은 정말로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메모를 잠깐 한 뒤, 질문을 이어갔다.
“좋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음… 솔직히 무덤덤하게 견뎌내기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너질 순 없습니다.”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확실히 6은 지도자적인 면모가 강하고, 그만큼 특히 타임키퍼인 나로서 더더욱 귀감이 되는 것 같다. 나 또한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성격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6의 견고함은 눈에 띄었다.
“음… 다음 질문을 해 보고자 합니다. 바깥 세상, 아페이론 학파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상 세계’는 어떤 것 같으십니까?”
“...솔직히, 신기한 부분도 있습니다. 제가 몰랐던 부분이 많았습니다. 적어도, 학파에서 말하는 것보다는 더 가치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섬에서보다는 꽤나 유해지신 것 같습니다.”
“진정한 진리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진리가 틀린 것이었다면,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외부 세계에 반감이 큰 아페이론 학파의 수장이라면 여전히 거부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맥락에서 6의 답변은 신선했다. 물론 진정한 진리의 추구와 잘못의 인정이라는 면에선 아페이론 학파의 학설과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유연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상깊었다.
“물론, 여전히 제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여전히 저의 관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합니다.”
이 정도의 거부감 내지 무관심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시간이 지나면 풀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정도로 소대원으로서의 활동에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다고 판단했다. 일단 빠르게 메모를 마친 뒤, 질문을 이어갔다.
우리 쪽 자료로도 이미 충분한 양의 정보를 얻었던지라, 인터뷰는 정말로 궁금한 부분이나 채워지지 않은 부분에 한해 진행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도 마찬가지지만, 인터뷰라기보다는 만담에 가깝다. 나와 신규 소대원이 정식으로 만나는 첫 번째 자리인 만큼, 기본적으로 서먹함을 풀기 위한 성격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6과는 다른 소대원들에 비해 의미있는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인터뷰는 대략 2시간 정도 하니 끝이 났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정리를 해야 하니, 먼저 가셔도 됩니다.”
6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머리를 만지며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6을 배웅한 소네트는 상담실에 들어와 자료 정리를 도와줬다. 자료 정리를 마친 나는 사무실의 책상으로 돌아와 인터뷰 내용 정리를 시작했다. 녹취는 자동으로 변환되니 딱히 할 일은 없었고, 일단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자료에 담아야 할 내용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정리를 마치니, 녹취 자료도 완성되었고, 써야 할 것들도 정리가 끝났다. 이제 준비할 것은 다 준비했으니, 소네트와 함께 일단 6의 프로파일링 자료를 완성하기로 했다. 37은 아직 회복이 덜 된 것 같아, 나중에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보고서에 인터뷰에서 얻은 내용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대상자의 재단과 소대에 대한 인식, 재단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 기타 참고할 만한 점 등을 적었다.
점심 시간을 거쳐 오후가 되서야 초안이 거의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해야 할 것은 작성자, 즉 타임키퍼의 한 줄 의견란이었다. 이 의견란은 이 프로파일링 자료, 곧 해당 소대원의 첫 인상이자 얼굴이 되는 만큼 문장 선택에 신중을 고했다.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나는 이 문장에 6의 ‘지도자적 면모’와 ‘견고함’을 강조하기로 했다. 몇 개 문장을 메모한 후, 소네트와 함께 문장 표현을 확정했다. 고민 끝에 나는 이 문장을 선택했다.
“모진 풍파와 존재적 위기에도, 견고하고 따름직하다.”
소네트는 이 문장을 보고 나에게도 적용되는 내용같다는 의견을 남겼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6과 나는 비슷한 점이 많다. 어느 단체를 이끄는 인물이라는 점, 힘든 일을 겪었다는 점, 가끔은 존재가 부정당할 위기도 있었다는 것 등이다. 그러한 만큼 6의 ‘타임키퍼의 한 줄 의견란’은 나에게도 적용이 될법한 내용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6의 프로파일링 자료 작성은 대략 마무리가 되었다. 앞으로 보고서를 읽어 보며 오류가 있는지, 오탈자는 없는지, 불필요한 내용은 없는지 등을 확인해야 하지만, 일단 대단원 하나가 막을 내렸다. 비록 37의 프로파일링 자료가 있어 완전한 끝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여유를 좀 가져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