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THE FOOL 광대
슈나이더
잘못태운 다시마
이봐, 당신. 당신도 내가 재밌지? 내가 모든 것을 건 것이, 사실은 아무도 없는 무대에 불과했던 사실 말이야. 나는 결국 광대였다는 것을 이제야 안게… 우습지? 슈나이더가 웃었다. 그 모든 사실이 유쾌한 듯이. 아니. 그런 판단 마저 유보해야 했다. 슈나이더는 당신을 가리켰다.
“커튼콜이야.”
이것은 당신이 볼 내 마지막 모습이니까.
*
슈나이더는 종종 꿈을 꿨다. 꿈속의 공간은 매번 새로웠다. 시칠리아의 익숙한 농장마저도 꿈에 나오면 알 수 없이 생소했다. 가슴을 흡족히 메우는 충동은 꿈에서 깨면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깨진 거울을 스쳐 지나가 물로 얼굴을 축였다. 슈나이더는 이 위치에 와서까지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슈나이더는 바닥에 있는 타일의 수를 다 세어본 적도 있었다. 시키면 무엇이든 하는 부하들은 모르는 것이 많았다. 딱히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손을 까딱였다. 슈나이더는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이곳까지 아득바득 올라오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다. 그리고 지금, 슈나이더는 거울 앞에 섰다. 모든 조각마다 슈나이더가 담겨 있었다. 슈나이더는 꿈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생소한 이유를 알았다. 슈나이더는 이제는 어디에서도 안전할 수 없었으니까. 생은 희박하다. 삶은 구차하다. 꿈은 흐릿하고, 미래는 생소하다. 슈나이더는 그 모든 것을 품고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했다. 실소가 나왔다.
좀처럼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슈나이더는 교양과 거리가 멀었다. 교양이 살려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책보다는 총이 더 가깝고, 지식보다는 피가 더 기꺼웠다. 그런 슈나이더에게 부하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작은 종이를 넘겨주었다. 눈썹을 까딱이며 의아해하는 슈나이더에게 부하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시간 죽이기엔 제법 괜찮아서요. 다시 돌려주려다 문득, 머릿속에 언니가 떠올랐다. 아. 어쩌면 마리안이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자는 시간에 읽어줄지도 몰라. 그러면 옆에서 듣는 목소리가 꽤 좋겠구나. 그래. 간결한 답을 하며 품 안에 넣었다. 총구를 들이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부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내가 부하마저 죽일 정도로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느릿느릿 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슈나이더는 부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고맙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부하는 가타부타 말을 붙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물러나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책을 펼쳤다. 작은 글씨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꼴이 퍽 생소했다. 마리안에게 주기 전에 조금이라도 읽어볼까 싶어 첫 구절을 읽어내렸다. ‘과거는 현재의 회상이며, 미래는 현재의 희망이다. 곧, 모든 것은 현재다.’ 문장은 슈나이더에게 별 의미가 없이 흩어졌다. 마리안은 좋아할까? 이런 알 수 없는 것으로? 책을 덮었다. 싫어하면 책을 태우자. 그 결심이 들고 나서야 책을 덮고 품 안에 넣을 수 있었다.
슈나이더는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에 재현된다. 슈나이더의 과거는 깨진 유리 같았다. 더는 원형을 떠올릴 수 없고 전부를 회상할 수도 없는, 언제나 기저에 깔린 날카로운 그리움. 그리고 그 모든 조각에서 자신이 보였다. 그러니 슈나이더에게 과거란 명확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 미래는? 슈나이더에게 미래는 알 수 없었다. 희망?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슈나이더에게는 차라리 비관적인 것이 더 가까웠다. 죽음이 도사리는 곳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을 수 있겠어. 그러나 책의 마지막엔 동감했다. 모든 것은 현재야.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도, 죽이는 것도, 또 내가 죽어가는 것도. 슈나이더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현재의 ‘나’를 위함이었다. 마리안이 읽어주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른하게 감기는 눈을 겨우 뜨고 마리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다른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첫 구절만큼은 입안에서 맴돌았다. 모든 것은 현재. 모든 것은…. 그런 슈나이더에게도 희망이 있다면 미래에, 그 언젠가 언니들을 데리고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쉽게 부서지는 것이니, 슈나이더는 쓰러져 있는 마리안을 붙잡았다. 차마 울지 못하는 슈나이더의 볼을 차가운 손이 쓸어내렸다. 마리안은 밤에 그랬던 것처럼 무어라 중얼거렸다. 안돼. 못 알아들었으니까, 알아들을 때까지 얘기해줘. 슈나이더는 답지 않은 투정을 부렸다. 뿌연 시야 속에 마리안이 붉었다. 단 한 번도, 마리안 몸에서 나오는 피의 색이 궁금해 본 적이 없는데. 마리안, 마리안. 재차 불렀으나 마리안의 팔이 힘없이 흔들렸다. 슈나이더는 마리안의 입에 귀를 댔다. 호흡이 몸에서 빠져나가기라도 하는지 헐떡이던 마리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마리안을 두고 집에서 나섰을 때부터? 미행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부터? 아니면, …아니면! 인생은 언제나 슈나이더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함께하지 못하는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주변은 언제나 파편처럼 흩어졌다.
앞으로의 희망이 없으면, 지켜야 할 사람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맹목적으로 살아있던 슈나이더는 허망한 품을 보았다. 이제는 온기를 잃어버린, 언니들을 떠올리면 마음속이 텅 비었다.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 아. 이제 마지막인가 봐.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아득바득 살아서 모든 것을 잃을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걸. 시칠리아에서 죽을걸. 그리고 깨달았다. 과거는 현재의 재현이라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라고. 이번에는 미래를 떠올렸다. 희망은 죽음뿐이니, 슈나이더에게 앞날은 없었다. 총알이 빠르게 삶을 관통해 지워주기를.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깜빡. 슈나이더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대 위에서 눈을 떴다. 극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명도 모두 꺼져 있었다. 정말,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그렇지. 당신 말고는 정말 아무도 없네. 생각이 흘러갔다. 당신? 슈나이더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계속 보고 있었어?”
내 삶을, 내 모든 것을? 다시 처음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나의 끝. 커튼콜. 그러니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극.
“이제 광대는 그만둘래.”
무대는 텅 비어버렸다. 슈나이더가 그만두었으므로.
작가의 말 │
참고한 노래: 써니힐-미드나잇 서커스
노래 감상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