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WHEEL OF FORTUNE 운명의 수레바퀴
클릭
아삭과
주변에 흙먼지가 잇달아 피어올랐다. 한때 무수한 생명들이 살고 있었던 땅에 쉴 새 없이 폭탄이 떨어졌다. 폭발의 진동이 전해질 때마다 지하 방공호 안에서 숨을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 딱딱한 여행 가방을 멘 한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방공호를 방문했다. 그는 이름 대신 ‘클릭’이라고 불렸다. 단순히, 셔터를 누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필름을 인화하면 그것이 온 세상에 알려진다. 이 좁은 곳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겪어야만 하는 참상들이 신문에 인쇄된다. 신문은 곧 아주 멀리 떨어진 누군가의 식탁에 커피와 함께 오른다. 냉소적인 몇몇을 제외하면 대다수는 이 사실에 큰 흥미를 보였다.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믿음은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렌즈 앞에 서서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클릭은 그들이 어떻게 잠을 자는지, 어떻게 식사하는지를, 때로는 조금 더 보기 힘든 모습까지도 가감 없이 그대로 담아냈다.
“포즈 취해 줄까? 어때? 이렇게. 자, 자! 빨리 찍으라고!”
호탕하고 코가 빨간 아저씨의 포즈는 목소리 크기에 비해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그를 잠시 기쁘게 만들었다.
방공호 밖으로 나가 갇히지 않은 공기를 마실 때마저도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따금 햇살이 눈 부셨고, 또 가끔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폭격기와 전투기가 새파란 하늘을 날 때면 클릭은 어김없이 카메라를 눈에 가져다 대었다. 더 가까이. 그는 항상 잔혹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었다. 부상은 안중에도 없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비명과 총성이 울리는, 삶과 죽음이 실시간으로 엇갈리는 현장에서 그는 찰나를 회색 염료로 박제했다. 박제된 순간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이며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뜬 채 팔을 치켜들고 구름이 멈추고 위협적으로 큰 전차의 바퀴가 풀잎을 짓이기는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다. 클릭의 사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단지 목격할 뿐, 선도 악도 아니다. 짧은 셔터음이 끝나면 다시 흙이 핏물처럼 튀고 군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몇 구의 시체가 바닥을 구른다. 기술은 변화해도 전쟁이라는 것은 늘 비슷하다. 그 본질이란 항상 죽이고 빼앗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드물게도 흰 나비를 보았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모습이 꼭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꽃잎 같았다. 셀 수 없는 목숨이 꽃잎처럼 떨어지더라도, 어쩌면 나비가 되어 높은 허공으로 되돌아올지 모른다. 클릭은 셔터를 누르지 않은 채 나비의 모습을 카메라로 비추었다. 필름이 부족했다. 흙은 식물로, 식물은 나비에게로, 나비는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끝없이 순환한다. 지구는 하루를 반복한다. 인간의 일생이란 억겁의 시간 속에서 얼마만큼의 의미를 가지는가. 숫자로 치환된 머리들을 보려면 운명이라는 거대한 이데아의 끄트머리를 수억 수천 배, 아니, 우스울 만큼 모자라다. 훨씬 더 확대해야만 한다. 그래서 클릭은 초점을 맞추고 직접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내 도달한 곳은 무한한 시간의 파편들이 겹치는, 셔터 속도만큼 짧디짧은 순간이다. 신호 없는 교차로 위에서 생과 사가 끊임없이 충돌한다. 멀리서 보면 필연, 가까이서 보면 우연이다. 언젠가는 그도 다른 만물처럼 돌아가는 운명의 수레바퀴 밑에서 스러질 것이다.
방공호 안에서 작은 환호성이 터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들뜬 표정으로 작은 보따리들을 들고 있었다. 적군이 물러나면서 두고 간 물자들을 필요한 만큼 나눈 것이었다. 여전히 넉넉하지는 않지만 음식과 의약품이 어느 정도 채워졌다. 그는 피가 잔뜩 묻은 헌 붕대를 새로 갈 수 있었다. 전투가 한창이었을 때 많은 부상자가 추가로 생겼기 때문에 밖에서 이러한 성과를 얻은 것은 다행이었다. 같이 외부로 다녀왔던 사람들이 운 좋게 국군에게서 들은 정보를 크게 외쳤다.
“여러분! 우리가 이겼소!”
“그래요! 적은 우리의 맹렬한 공세를 못 이기고 퇴각했다고 합니다! 지금 국군이 도망가는 적들을 쫓고 있대요.”
이번에는 환호성에 이어 열광적인 박수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통조림 스튜와 미지근한 물이 어떤 진수성찬보다 달게 느껴졌다. 모두 한동안은 이 지역이 평화로울 것이라 믿었다. 그야말로 짧은 봄날이었다. 여전히 파괴된 집과 헤어진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그들을 늘 차갑고 습한 지하로 짓누르던 암울함은 한결 가신 채였다. 클릭도 오랜만에 활기를 띠는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사람들이 손을 휘저으며 그를 불렀다.
“클릭! 이참에 다 같이 사진 한 컷 찍는 게 어때요?”
“좋아요. 찍을게요. 여기 모여서 서 주세요.”
클릭은 흔쾌히 승낙했다. 즐거운 표정을 한 사람들을 찍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셔터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다시 웃고 떠들었다.
그는 곧 군인 기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장소를 이동할 때 같이 이동해야 했다. 아군이 합류한다는 소식이 있으니 돌아가면 곧 보급품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종군기자의 표시를 달고 전쟁터를 찾아가는 손님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그대로 남지 않고 오히려 거센 바람을 따라다닌다. 끈으로 꽉 조여진 군화들이 멈출 때 함께 멈추고 걸을 때 함께 걸었다. 이동하는 동안 주변 풍경이 거침없이 바뀌었다. 어느새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못 이겨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환절기의 향이 코끝에서 맴돌았다. 이윽고 모자 쓴 군화들이 일제히 수송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하나둘 우거진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듣기로는 이곳이 이전의 승전을 통해 새로 진격한 전선이라는 것 같았다. 그들이 등지고 있는 도시는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뒤늦게 적군이 도착하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에 이름 모르는 군인이 클릭을 힐끗 보더니 말을 건넸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사람이 많을 것 같군. 그렇지 않나? 그중 당신이 끼어 있지 않기를 바라오. 다들 자네 같은 기자에게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을 것 같으니 말이야.”
“그건, 물론이죠.”
애초에 바라지 않았던 일이다. 혼란스러운 전투 상황에서 기자를 정확하게 식별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이나 카메라에 흠집이 나는 것이 기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건 더 중요한 사명 앞에서는 무의미해진다. 군인에게는 군인의 일이 있고 기자에게는 기자의 일이 있으니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었다.
누군가의 신체가 나뒹구는 일은 흔했다. 세계의 전쟁이니 당연했다. 게다가 무려 두 번째였다. 참호전 위주로 전개되었던 제 1차 세계대전과는 각국의 기술 수준부터가 달랐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무리 사이로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클릭은 약 30M 앞에서 터지는 폭탄을 카메라 너머로 바라보았다.
연기가 점차 걷히자 폭발 속에서 튄 돌을 맞았는지 푹 패인 철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잔해가 뒤섞여 있었다. 아까 말을 걸었던 군인의 생사는 여전히 모르는 채였다.
달빛이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막으려는 듯 구름이 파도처럼 달에게로 밀려왔다. 전황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았다. 폭격기가 끊임없이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격추되는 모습도 가끔 보였다. 떨어진 비행기는 낙하하는 별똥별처럼, 땅에 닿고서 잠깐 크게 반짝 타오르다가 저물었다. 밤 내내 교착상태가 이어지고 의미 없는 총알 교환이 이루어졌다. 병사들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지쳐 있었다. 총을 잡은 채로 차가운 진흙 위에 엎드려서 조는 사람도 있었다. 종군기자에게는 직업적 임무를 수행하기에 좋지 않은 시간이었다. 클릭은 나무에 기댄 채 아주 잠깐 잠에 들었다. 꿈에 흰 고양이가 나왔다.
날이 밝자 멀리 반파된 건물에도 햇빛이 드리웠다. 전투가 중단되고 양측은 잠시 사망자와 부상자를 헤아리는 시간을 가졌다. 클릭도 후방으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대피했을지 신경이 쓰였다. 아침으로 다 같이 통조림을 열었다. 고기와 감자가 들어 있었다. 클릭은 그것들을 얼른 삼켜 버리고 다시 일어섰다. 모두 줄 맞추어 모이자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으려는 연설이 이어졌다.
시간은 늘 그렇듯 빠르게 흘렀다. 이곳에 온 지 대략 이 주하고도 며칠쯤 되었을까. 결과를 말하자면, 패배했다. 이 지역을 포기하고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적군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동맹군을 호출하자 이쪽에게 급격하게 불리한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군단의 병사 수가 크게 줄었다. 결국 저번에 방공호에서 지냈던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의 공장을 아군이 점령해서 철도로 물자를 보급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종종 폭격이 있지만 아직 적군이 본격적으로 진입하지는 못 했다는 군단장의 설명이 있었다. 군단은 적군이 그 도시를 탈환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했다.
적군은 추격을 거듭했다. 아군은 계속해서 뒤로, 뒤로 물러났다. 잔인한 백병전이 계속되었다. 건물들은 불타고 무너져 내렸다. 골목 사이로 총알이 날아다녔다. 질리도록 많이 보던 광경이다. 그리고 많이 볼 광경이다. 클릭은 계속 군함에서, 폭격기에서, 또는 지금처럼 전차 옆에서 사진을 찍을 것이다. 일전에 방공호에 있을 때 다 같이 찍었던 사진이 생각났다. 와서 같이 서라는 제안에 필요 없다며 사양했는데, 누군가가 극구 고집한 덕분에 클릭도 그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자신의 카메라로 사진 찍히는 것은 새로운 기분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은 지금쯤······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다시 대피해 있겠지. 어쩌면 피난을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클릭은 조용히 카메라를 들었다. 생이 끝난 후에도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는 카메라를 놓지 않을 것이다. 설령 보통의 경우와는 다른 방법으로 돌아오더라도. 전차와 수레의 바퀴가 돌아가고, 꽃잎이 지고 흙이 나비가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