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이미지 제공: reza shayestehpour

15) DEVIL 악마
파비아

                                                    
                                                               

링티

불행한 날들과 운세에 관한 소고

 

 

 가게에 발을 딛자 염세의 냄새가 폐를 채운다. 얼굴이 일그러진 인사들은 싸구려 술에 찬사를 보내고 동시에 들려오는 여러 노랫소리-라곤 하지만, 그가 듣기에는 고함소리에 가깝다-는 두통을 자아낸다. “저 사람이 마시고 있는 걸로.”라고 간단히 주문한 음료는 병 표면이 불쾌하게 끈적거려 건드리지도 않은 채로 탁자에 남겨졌다. 무언가를 마실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으므로 유감은 없었다.

 천장에 나란히 붙은 전구들을 따라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쪼개진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빼자 낡은 코트 안으로 왜소한 몸을 숨기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얘들아, 진정해.” 청부업자는 되뇐다. 이미 세포단위부터 긴장하고 흥분하기 시작한 그는 사방으로 쪼개지는 제 그림자들이 멋대로 뛰쳐나가는 것을 억눌렀다. 수상한 낌새를 알아챈 타깃은 허둥거리며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늑대인간은 그만 조소를 참지 못했다. 왜? 나를 더 재미있게 해주지 않고. 멍청한 선택을 한 사냥감에게 심심한 위로를 던지며 병 아래 팁을 끼워 넣곤 뒷문으로 향했다. 사내는 멀리 가지 못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는 긴 망설임도, 큰 힘도 필요하지 않으므로.

 Uno, due, tre. 그리고 fine. 곧이어 남은 것은 초라한 시체 한 구와 여전히 피에 굶주려 요동치는 그림자들, 골목의 눅눅한 공기가 상쾌한 듯 불콰한 웃음을 띠는 청부업자 하나뿐이었다. 으르렁거리며 목을 긁는 웃음소리가 나고, 그마저도 꾸역꾸역 인간인 척 짖어대는 짐승들의 소음에 의해 묻혀버린다.

 역시, 이런 지루하고도 따분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악마가 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예술에 대단한 소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파비아는 늘 무거운 시체를 들춰가며 기념할 만한 물건을 찾곤 했다. 대단한 것일 필요도 없다. 팔찌나 금속 장식품, 넥타이핀이라도 그럭저럭 챙길만하다. 희생자들의 흔적을 모아둔 캐비넷에 물건이 쌓이는 걸 계속 들춰보는 건 도대체 어떤 충동에서 인 건지.

 보여줄까? 친절히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정중한 거절. 그럴 때면 파비아도 서운한 내색을 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정말로 보여줄 마음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소중한가? 글쎄. 피 묻은 발로 밟으며 지나온 자리에 남은 검붉은 발자국 같은 느낌이랄까.

 아쉽게도 이번 타깃은 허탕이었다. 지갑에 동전은커녕 옷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주머니를 다 뒤집어 털어봐도 부옇게 먼지만 일어날 뿐이다. 파비아는 입맛을 다시며 축 처진 사내를 내려놓는데, 순간 반짝이는 금빛이 눈을 스쳤다.

 뭐길래 이렇게까지 숨겨?라며 코트를 열어젖힌 그는 다시 한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잘 쳐줘도 금으로 테두리에 박을 씌운 것이 전부인, 양면에 정교한 그림이 인쇄된 둥근 모서리의 직사각형 카드 한 장이었다. 한쪽 면에는 염소 뿔이 달린 악마와 함께 숫자와 문자가 그려져 있었고, 반대쪽에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모서리는 닳아 누리끼리한 면이 드러나고, 금박은 군데군데 벗겨져 있는, 손자국과 흠집들로 사용감이 그대로 남아있는 낡은 카드였다. 그나마 온전한 모양새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질 좋고 질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후가공 또한 공을 들인 것으로 보였다. 운세를 점칠 때 사용하곤 하는 카드처럼 보였지만, 낱장으로 품 속에 지니고 있을 만한 카드는 아니었으며 그 외의 용도는 파비아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으므로 혀를 차고는 이미 죽은 이의 남은 길이 재앙만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분풀이나 하고 말았다. 그것이 불행이나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꽤나 신빙성 있는 운세였다며 실소를 뱉는 것도 잊지 않고서.

 빈손으로 돌아오긴 싫은 마음에 달랑 들고 온 카드 한 장은 그의 소중한 캐비닛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넣는 것을 잊었거나, 그럴 가치조차 없다고 느꼈거나.

 그렇게 카드는 탁자 위에 남겨진다. 그가 다시 발견할 때까지.

 

 

운세의 힘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는 마렴.

약간의 의식, 조금의 불안, 잠깐의 망설임으로도 그것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오늘따라 일이 풀리지 않는다-라고 생각될 때마다 곱씹어 보자고.

아이야, 카드 안에서 무엇을 보았지?

 

 

 어둠, 구속, 뒤틀린 애착, 애착, 애착.

 매일 밤 어둠이 찾아들 때면 과거의 편린들이 항상 그를 괴롭혔다. 지금보다 세 뼘은 작았을 그때로 다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사지를 제대로 가눌 수가 없고 목에서는 짐승의 것과 같은 신음 소리만이 들끓는다. 완전한 어둠에는 그림자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실명이라도 한 것인지, 또는 미쳐버려서 눈앞이 흐려지기라도 한 것인지, 그렇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곱씹고 곱씹고 곱씹다 보면 지옥 속이라도 볕이 들기는 한다는 듯 무심한 달빛 한 줄기가 우그러진 벽 틈 사이로 내려앉는다. 몸을 세우고 먼지 섞인 눈물을 문질러 닦으면 그제야 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이 웅크렸던 몸을 펴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낮게 목을 긁는 소리를 낸다.

 악마는 풍족한 이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지옥에 발을 들여놓고도 제 처지를 모르는 오만한 이들이 지옥의 밑바닥으로 빠지기 쉬운 법이니. 그러니 이것은 악마의 지독한 속삭임일 뿐이다. 어린 늑대가 무리를 잃고 뒷걸음치기를 바라는.

 그대로 뒤로 쓰러져 누우면 달빛이 얼굴에 닿는다. 그의 사랑스러운 그림자들이 그의 주변을 감싸듯 자리를 잡고 엎드린다. 얇은 눈꺼풀을 뚫고 옅은 달빛이 눈 안을 감돈다. 오늘은 그럭저럭 다시 잠들 수 있을 듯하다-라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는다.

 

 

이제 카드를 뒤집어 볼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아이야.

네게 어떤 해도 가할 수 없다는 걸 알잖니.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지. 안 그렇니?

 

 

 중독, 욕망, 오만?

 악몽을 꾸는 이에게 아침잠은 사치이다. 안드레아가 제 위로 올라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온통 끈적하고 축축해진 옷을 갈무리하고 짜증 섞인 소리를 내며 부엌으로 가서는, 엉망인 냉장고를 한 번 더 저주하고 식탁에 앉아 거만하게 다리를 올려놓는다.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드니 언젠가의 임무에서 들고 온 식탁에 반쯤 걸려져 있었다. 입에 넣은 크루아상을 우물거리며 한 손을 뻗는다. 그러곤 무심하게 카드를 반 바퀴 돌려 식탁 안쪽으로 자리해 놓고는, 그 이상의 관심은 애초에 없었는지 남은 빵조각에 잼을 발라 입에 넣는다. 어떠한 개념이 생각나듯 하다 말고 머릿속에서 휘발된다. 그리고 파비아는, 아무래도 좋다,라고 생각했다.

 악마, 악마라? 어젯밤에는 그런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오렌지 주스를 넘기며 눈을 굴렸다. 인공적인 단맛이 미뢰를 자극한다. 그래봤자 손에 쥐면 구겨질 종이 따위가,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운세 따위가, 저 밑바닥 지옥-그래, 단테의 신곡에서나 주절대는 머저리 같은 그거 말이다-에 사는지 마는지도 모르는 악마 같은 것들 따위가 제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가는 길에는 막대사탕을 챙긴다. 포장을 벗기고 혀가 아릴 때까지 굴려 녹이면 뉴런 하나까지 톡, 하고 터지는 기분이다. 뒤늦게 알게 된 단맛의 향연은 그 무엇보다 중독성이 강하고, 그러나 위험성이 낮아 천천히 그를 잠식해나간다. 악마에게 목숨을 넘길 바에는 설탕에게 넘기겠다는 단맛 중독자의 포부. 그리고 고작 설탕 따위에 꺼질 목숨이라면 순순히 죽어주긴 아깝다는 늑대의 오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오지 않았었던가.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다. 이까짓 위협으로는 죽음은커녕 삶에 대한 더 강한 욕망만이 들끓는다. 그러니 내가 죽기를 바란다면, 내게 더 큰 위험을, 더 큰 삶을, 더 큰 삶의 욕망을!

 

 

 파괴, 불안, 하지만 매력적이지, 응?

 어쨌거나 파비아는, 자신에게 맡겨진 또 다른 임무를 해치워야 하는 청부업자이다. 그런 멍청한 카드 없이도, 항상 불행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파비아는, 그러한 불행을 아주 좋은 일들로 만들어 넘겨버릴 줄 아는 이었다. 언제 생긴지도 모를 상처가 벌어진다. 그 사이에서 불같이 뜨거운 것이 터져 나오듯 한다. 제 그림자들은 동족의 피 냄새를 맡고 사납게 짖어대고, 전래 없던 흥분이 솟구친다. 그를 죽이는 모든 것들이, 그를 더욱 살게 만든다는 것은 절대로 모순이 될 수 없다.

 업보는 끊이지 않고 대물림된다. 죽고 죽이는 일을 업으로 하는 이들에겐 필연적으로 우로보로스의 저주가 진득하게 발등에 달라붙는다. 물론, 전부 차치하고서 악마의 농간이라 해도 좋다. 아니면 재수 없게 주운 타로카드 한 장에 온갖 욕을 박아볼까? 어느 쪽이든 기분은 어지간히 나아질 것이다. 손에는 언제 집어온 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카드가 들려있다. 늑대인간은 조소한다. 빌어먹을.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다시, 빌어먹을!

 이 엿 같은 운세인지 악마인지 하는 것이 종일 저를 따라다니는 것은 짜증나고 구역질나는 일이다. 카드를 손에 쥐면 얇은 종이는 그대로 우그러진다. 구겨진 카드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발로 밟아댄다. 불행한 인생도 제 손에 있어야만 하는 쓸데없는 자존심. 보잘것없는 생이라도 제 것이어야만 만족하는 별 볼일 없는 욕심. 위험조차, 죽음조차 온전히 저만의 것이라는 자기 파괴적인 욕구의 오발탄.

 

 

많은 이들이 이 실없는 종이 조각에 운명이 걸려있다고 착각하곤 해.

자, 어리석은 늑대야.

이제 다시 바포메트를 손에 넣고 힘껏 쥐어.

구겨진 카드 따위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게.

누가 이 불행한 인생의 주인인지를 세상에 보여주자고.

 

 

 악마 따위, 제 앞에 나타난다 하더라도 와인 잔 한 번 부딪치고 외쳐주면 될 테지. 잘 가, 내 사랑, 내 죽음. 나의 삶은 아직 이곳에 있으니! 나의 영원한 피에몬테의 밤을 위해, 마에스트로를 위해 건배나 하고 영원히 꺼지길! 그러고선 머리통에 예쁘게 구멍을 내줄 것이다. 어쩌면 두 번. 어쩌면 만족스러울 때까지!

 그러니, 그깟 종이에 그려진 어설픈 악마의 초상화가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스스로가 악마가 되어주면 될 것이다. 제가 스스로 악마가 된다면 될 것이다! 다시, 손안에서 리볼버가 빙글 돌아가고, Uno, due, tre. 그리고 fine. 남은 건 악마를 자처하는 불행한 늑대인간 하나, 그리고 얼굴 부분에 구멍이 뚫린 채로 검게 타고 있는 악마의 카드 한 장뿐이다.

 혀를 깨물면 아릿한 단맛이 다시금 흥분을 자극한다.

COPYRIGHT©2024 BLUEPOCH사의 모바일게임 <리버스: 1999> 타로카드 비공식 합작 ALL RIGHTS RESERVED.

각 페이지에 있는 모든 글과 그림은 각 제작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며 무단으로 전재 및 유포, 2차 가공을 금합니다.
​​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