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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 reza shayestehpour

8) STRENGTH 힘
갈기모래

                                                    
                                                               

이선

 와르르. 코끝을 스치는 잿더미의 냄새. 숯에 가까운 검댕이 눈 위로 떨어졌다. 남자는 제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기둥을 보았다. 눈을 깜빡인다 생각해도 좁아지지 않는 시야와 아직 남아있는 왼팔의 감각. 익숙한 풍경이었다. 남자는 무너져내리는 기둥의 곁가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집과 천장을 받치던 그 기둥은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몽롱한 잠은 곧잘 현실인 척을 하였지만, 남자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서 남자는 그저 무너지는 기둥을 바라보며, 그것이 완전히 자신을 덮치도록 두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과거의 마음과 후회. 화끈거리는 공기와 절규, 그리고 통곡. 남자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옛 기억임을 상기했다. 하여 남자는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붕괴와 함께 눈을 떴다.

 

 어떤 날에도 해는 뜬다고 했던가. 어슴푸레 밝아오는 볕이 남자의 손에 닿았다. 남자는 몇 차례 눈을 감았다 뜨며 볕을 간지럽혀 보았다. 한 자락의 빛에서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숨을 길게 뱉었다. 그 볕에서 온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정리는 망각이 아니었으므로, 한번 흔들린 몸과 마음은 해묵은 감정에도 쉽게 다시 뒤섞이고는 했다. 진탕으로 섞인 마음은 온기보다도 느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뻣뻣하게 굳었던 근육에서 힘을 풀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왼팔의 감각 또한 지워냈다. 닿고 만져지는 것에 집중하며, 조금씩 제 안에서부터 밖으로, 다시 밖에서부터 안으로 몇 종의 감각을 깜빡였다.

 

 그저 폐를 부풀리고 숨을 뱉어내는 것에만 집중하기를 몇 차례. 그렇게 몇 번의 숨이 지나간 뒤에야 뒤틀린 과거와 현재가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았다.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부드럽지 않은, 제법 거칠다면 거친 털 뭉치가 따라 몸을 털었다. 어이쿠. 남자는 부러 더 부산스럽게 날리는 털에 고개를 털었다. 재채기가 몇 번, 그에 놀란 늑대가 다른 늑대에게 달려들어 부딪히기를 몇 번. 곧 으하학,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의미와 이유를 찾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몫이었으니까. 그러니 잠겨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는 지난밤을 잘 개어 정리하고 구겨진 옷을 툭툭 털었다.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은 머리칼이 길게 늘어졌다. 곧 스며든 바람이 머리칼 사이사이를 헤집으면, 그제야 지난밤의 모든 흔적이 시원하게 사그라들었다.

 

 남자의 손은 살아있는 것이 하나, 살아있지 않은 것이 하나였다. 그는 조잡한 왼팔을 몇 번 흔들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달라진 무게중심은 아직도 이따금 낯선 데가 있었다. 고원의 황량하거나 청량한 대기가 길을 열어주었다. 잘그락. 머리칼에 꿰인 가면의 장식은 늘 그렇듯 약간의 흥을 더해주었다.

 

 평평하다 할 바닥은 없었고, 길이라 불릴 것은 전부 들짐승의 걸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 그에게는 이 또한 모두 익숙한 것이라, 그는 그저 북과 가면을 들고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르는 이유는 많았다. 다만 개중 목적이라 부를 것은 없었다. 마음을 비우고자 하는 것도, 배움을 청하기 위해 오르는 것 또한 아니었다.

 

 한때는 그저 고통만을 목적으로 두었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 벌을 내린다는 명목하에, 실상은 그저 마음의 고통을 육신의 고통으로 덮고자 한 날들. 팔 하나를 바쳐 제 목숨만은 살린 자신에 대한 분노. 믿음을 저버린 친구에 대한 원망. 끝의 끝까지 자신을 탓하던 아비에 대한 괴로움. 어둡고 진득하게 눌어붙은 그 감정들은 돌고 돌아 자신을 향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가. 또 왜 그것이 가족을 향해야 했는가. 인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그저 철모르는 어린 오만이었나. 수십, 수백 가지 물음 또한 감정과 함께 자신을 향했다. 고민의 끝은 늘 후회와 자책이었고, 모든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후드득. 비탈의 돌이 제 위치를 다 지켜내지 못하고 아래로 굴렀다. 길은 조금 더 좁아졌다. 남자는 그에 어이쿠, 소리를 내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는 그 설산에서 죽어버리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포기하고 도망치고자 했던 모든 비겁에서 벗어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남자는 설핏 웃었다. 따지자면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죽어버렸다면 그 모든 혼란은 몸과 함께 썩어갔을 테니.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그 고행은 끝까지 가져갈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남자는 도착한 봉우리의 꼭대기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날씨 한번 좋다! 마음과 달리 몸은 늘 솔직했다. 속이 비어갈 즈음에는 배가 고팠고, 위험한 상황에는 몸이 떨렸다. 처음에는 이를 그저 살고 싶은 마음이라 여겼다. 죽음을 원하면서도, 그 속은 결국 삶을 원한 것이라고. 그러나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온 순간, 남자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원하던 것은 그저 삶과 죽음의 차원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험한 길을 밟아나가며 나아간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곳에 답이 있을 거라는 믿음. 이 뒤집힌 속을 명확히 까발려줄 존재가 있으리라는 맹목. 남자는 그 불길 속 모두의 죽음이 자신이 켜켜이 쌓아 온 친밀의 결과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면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을 외면하고 싶었고, 동시에 어떤 것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고 싶었다. 머릿속은 완전히 흙탕물 같았다. 어떤 것이 섞여 부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오수처럼,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서 남자는 차라리 누군가가 그 답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늙은 샤먼이든, 산의 신비한 존재든 그 주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답.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이 받아들이고야 마는 그런 답. 그가 원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남자는 이제 가면을 뒤집어썼다. 늙은 호랑이와 병든 늑대, 서로 싸우다 죽은 곰의 이빨. 가면의 안쪽에서는 제 몫을 다 채운 삶의 냄새가 났다. 시선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절명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장수로 보일 수 있겠으나 결국 모든 죽음은 그 모양 그대로 온전했다. 잘 마른 사슴 가죽이 좋은 울림을 냈다. 남자는 늙은 샤먼의 춤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기억 속 움직임은 매번 조금씩 달랐다. 그는 친절한 스승이 아니었기에, 남자는 기억 속의 움직임을 토대로 자신의 춤을 만들어야만 했다. 다만 남자는 따르는 것보다 제 것을 만드는 데에 조금 더 재능이 있었으므로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결국 답은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모든 죽음에 대한 원인도, 결과도 지레짐작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최후, 그리고 그들의 심정. 그것은 그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는, 고독한 그 사고. 그를 알고자 하여 왜곡하고 곡해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로 인해 괴로워한 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마를 괴로워한다 해도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머릿속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직접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나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러니 그가 찾은 정답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 산이, 고통이 답을 내려줄 것이라 믿지 않고, 그 스스로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해서 남자는 짐작하기를 그만두었다. 과거에서 그른 것을 찾는 것도 그만두었다. 직접 말을 통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큰 바위와, 가시덤불, 크루피가 보여준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그저 짐작하여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과 통해, 결국은 서로의 뜻을 알고 나아가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여 그는 처음의 원망도 마지막의 포옹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은 필연으로 인정하였다. 자신이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그 흰 코끼리가 마음을 바꿔 무언가를 남겨둔 것인지, 그런 것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고통은 그를 설산으로 이끌었다. 모든 것을 태운 불은 그에게 헤맬 계기를 주었다. 그러니 그는 지난날의 어리석음과 무른 마음을 후회하는 대신, 그저 춤을 추었다. 동작과 동작이 춤으로 이어지듯 시간과 시간은 결국 삶으로 이어졌다. 고통이 깨달음으로, 다시 힘으로 이어지는 동안 늑대 무리는 떼를 지어 울었다. 남자는 그에 호탕하게 웃었다.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의미였으며, 찾지 않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후회에 불과했다. 남자는 이제 그것이 오직 마음에 달렸음을 알았다.

 

 이어지던 춤은 한 번의 북소리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남자는 휘유,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고원에는 거울이 없었으니 그는 자신의 움직임이 어떤 춤이 되었는지는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었다. 그 스스로 이미 충분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북을 내려놓고 가문의 인장이 찍힌 빈 편지를 꺼내보았다. 희게 찍힌 밀랍은 화마에 집어삼켜진 그대로였다. 모르판크. 이제는 스러진 푸샤, 사르마라는 이름.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북과 가면을 한 손에 집어들고, 남은 손으로 늑대 무리의 대장을 북북 쓰다듬었다. 푸드득. 불쾌한 듯 달려드는 짐승의 태에 남자는 부러 호들갑스럽게 손을 물렸다. 어이쿠. 이거 고장나면 곤란하다고, 친구. 따위의 말에도 짐승은 코웃음을 치며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짐승의 털을 한껏 헝클여놓았다. 곧 그의 휘파람이 불만스러운 짐승 뒤로 따라붙었다. 도달한 곳에서 도망친 곳까지. 이제는 만들어지고 있는 답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나야 할 때였다.

 

 “일단, 다녀와 보자고. 뭐든 그 길에 답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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